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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식 대통령제'의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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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청와대 앞에 소가 나타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다. "3선 개헌하라고 왔구먼."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으로 보내라", 전두환 대통령은 "하나회 불러", 노태우 대통령은 "누구 본 사람 없지?", 김영삼 대통령은 "현철이 줘라",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에 보내지", 노무현 대통령은 "왜 나한테 왔대? 당이나 총리한테 가지"라고 했다.

최근 접한 시중의 우스개인데 대통령들의 특징을 절묘하게 접목시켰다. 노 대통령의 경우 분권형 국정 운영과 당정 분리 방침을 빗대고는 은연중 '책임 회피'를 꼬집어 더 재미있다.

총리에게 내각 통할권을 위임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대통령이 집권 여당에 간섭하지 않는 당정 분리 원칙은 노 대통령의 회심작이다. 우리 정치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게 '제왕적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 여당을 장악하고, 그 바탕에서 국회를 좌지우지함으로써 입법권과 행정권을 양손에 거머쥔 무소불위의 권력자. 그 폐해는 대통령의 독주와 권력 주변의 부정부패로 나타났다. 이것을 바로잡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가 바로 '분권과 분리'라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프랑스의 이원집정제를 많이 닮았지만 우리에겐 전혀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노무현식 대통령제'인 셈이다.

새 정치실험의 취지엔 모두가 공감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효율성인데 국정 운영에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가 여당 쪽에서부터 먼저 터져나왔다. 지난달 중순 열린우리당 일각에선 당정 분리로 당이 소외되고 당정 협조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를 일축했다. 오히려 "총리의 국정 통할권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당의 주도권을 실효성 있게 하는 방안을 당과 협의하겠다"며 당정 분리 강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과연 이 실험이 최상의 방책인지, 보완할 대목은 없는지 심도있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새 제도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도 그렇다.

현실정치에서 나타난 '노무현식 대통령제'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 경시현상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주요 정치 주체란 대통령과 정당.의회.내각을 꼽을 수 있다. 대통령과 각 주체 간 상호작용이 활발하고 부드러우면 그만큼 정치가 안정되고 생산적이 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거꾸로 야당은커녕 여당 쪽과의 의사소통마저 차단하고 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정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대통령은 대야 관계를 여당과 총리에게 맡겨 놓고 있다. 그러나 여당대표나 총리가 대통령과 같을 수 없다. 역할이 다르고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 더군다나 여당 스스로 '구심점이 없다'고 호소할 정도이니 야당이 여당과의 대화에 흥이 날 리 없다. 총리 또한 국정의 많은 부분을 위임받았다지만 역시 대리인 자격인 데다 이해찬 총리는 협상 상대에 대고 "차떼기당"이라고 욕설하는 '격투형'이다.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다. 이 때문에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가 대통령을 상대로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은 거꾸로 국회와 야당을 상대로 설득하고 협의해 나가는 게 옳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야당과의 대화를 당과 총리에게 미룬 채 '야당 때문에 어렵다'고 헐뜯거나 '다른 당과 연정'이라는 머릿수 정치를 도모하려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정치의 핵심 주체인 대통령이 정치와 선을 긋고 있는 모습은 분명 아이러니다. 새로운 군림형 권위주의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고 '분권과 분리'라는 편리한 차단막 아래 숨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다.

대통령의 권한 행사 축소는 노 대통령의 업적으로 남을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선 의미가 반감된다. 그러한 도덕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문화를 가꿔 가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노 대통령도 수차례 강조해 온 상생의 정치가 선보여야 비로소 개혁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노 대통령이 정치판에서 발을 뺄 게 아니라 그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박물관에 보냈던 여야 영수회담을 다시 꺼내 양보와 타협의 새 정치 장르를 연출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노무현식 대통령제'는 이외에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경계가 불분명한 데서 오는 혼선과 대통령이 바뀌면 원위치될 수도 있는 시스템상의 결여 등이 문제점과 과제로 꼽히고 있다. 모처럼의 정치실험이 진정한 정치 발전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산들이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