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학문 자립국이 되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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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라크 전쟁과 사스 공포에 북핵 문제까지 겹쳐 나라 안팎이 온통 뒤숭숭한 터에 최근 그나마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국내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논문 가운데 과학논문색인(SCI)에 등록된 숫자가 모두 1만4천9백16편을 기록해 한해 전에 비해 한단계 상승한 세계 13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대학들 가운데에서는 서울대가 여섯 단계 올라간 34위를 차지했고, 연세대와 한국과기원 등도 1백위권대에 올라와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기초과학의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구나 하는 자부심과 함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연구실을 지켜온 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다.

*** 국가 편중 여전한 과학 논문數

그러나 발표된 통계수치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저 기뻐만 하기는 이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상위 그룹에 랭크된 미.일.영.독.불 등 다섯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60%에 이르고 있어 소수 국가에 의한 지식의 편중적 지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의 논문 편수와 우리와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무려 20배나 많은 숫자이고 일본만 해도 우리의 5배에 육박하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 수에 비유해 우리가 10개를 땄다면 미국은 2백개, 일본은 50개를 획득한 셈이다.

SCI는 자연과학 논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실정이 어떠한지 통계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상황이 더 좋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기초학문 수준이 과거에 비해서는 분명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선진국들과의 격차를 여전히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우리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문제의 핵심은 결국 장기적인 비전과 그것을 성취하는 데에 필요한 조직적인 체계의 부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와 경제 분야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교육 부문에서도 비전과 체계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기초학문과 같이 그 성과와 효용이 금세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분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지금과 같이 소수의 우수 연구자들과 들쭉날쭉한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 수행되는 연구로는 지속적인 발전과 질적인 도약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전과 체계는 마치 잘 계획된 도시의 교통망과 같은 것이다. 운전자 개인들이 아무리 탁월한 운전실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로구획과 신호체계가 엉망이라면 정체는 피할 수 없게 된다.

개인의 능력에 다소간의 편차가 있더라도 체계적으로 구획된 분야에서 각자 작업한 결과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다면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거대한 플랜은 일 개인의 시야에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커다란 조직, 즉 대학이나 정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대학과 정부는 과연 적절한 비전과 체계를 제시해주고 있는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 개혁은 곳곳에서 혼란과 시행착오를 낳으면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교육정책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은 지 오래다.

강단에서 교육과 연구에 몰두해야 할 교수들이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석.박사 과정의 정원조차 제대로 차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실정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13위라는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 개인 역량 결집시킬 틀 만들길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난데 단합이 잘 안된다는 말들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모래알 같은 개인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고 그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는 틀이 없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유달리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학문과 문화의 발전은 마치 테트리스 게임과도 같아서 길고 짧고 꺾여진 막대기들이 빈자리를 메우면서 밑바닥부터 하나씩 쌓여 이뤄진다.

교육을 책임지는 당국이 비전과 체계를 세우고 단단한 기초를 만들어 갈 때, 우리도 머지않아 국내의 인력과 시설만으로도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학문의 자립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金浩東 서울대 교수/ 동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