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이념」으로 뭉친 "폭력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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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 동안 다져온 우리들의 사상무장을 행동으로 보여 줄 때다. 미문화원에 불을 질러라!』
3월10일 하오 8시, 이들 폭력결사의 본거지였던 문부식의 자취방(부산시 부민동)에 모인 4인의 여자 방화조는 문의 지령에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부산시내 지하 점 조직의 리더 문부식과 그의 애인 김은숙-. 여대생들을 손아귀에 넣고 생명 없는 인형처럼 움직였던 문과 남학생들을 수족처럼 부렸던 김은 환상의 이념과 살을 섞은 사실상의 부부관계로 똘똘 뭉친 동반자였다.
문의 고향은 경남 마산시 월남동.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산으로 이사왔고 부산시 아미동 2가 41에서 자랐다.
77년 부산 D고를 졸업, 그해 고신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그 당시 아버지는 광업으로 중류 정도의 집안이었으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귀면서 사업마저 실패,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 때문에 문이 대학 2학년 때 병이 깊어 숨졌고 아버지가 몇 달 뒤 다른 여자와 재혼,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문은 부산에서 혼자 하숙과 자취를 하며 지냈다.
한편 김은숙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교회 전도사인 홀어머니 최모씨(55) 밑에서 남동생 1명과 함께 부산 시내에서 성장했다.
78년 부산 이사벨 여고를 졸업, 바로 고신대 기독교육과에 입학했다. 현재는 부산시 엄궁동 454의7 Y교회 사택에서 살고있다. 어머니 최씨가 신앙심이 두텁고 엄격해 김은 항상 집안에선 조용하고 순종하는 편이었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78년 봄 김이 대학에 입학한 뒤였다. 대학 1년 선후배 관계인 이들은 고교 때부터 독서를 즐겨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독후감 등을 나누면서 가까워 졌다.
문의 친구 K모군(23·대학원생)에 따르면 문은 당초 김의 같은 과 친구인 김모양(22)과 더 가깝게 지냈으나 김은숙이 문을 가로챈 셈이 되었다고 했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인 문은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고 화술이 능란했다.
그 당시 김은 부산시내 문제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J교회에 다니며 이호철(검거) 등과 만나게 됐으며 자연히 문도 김을 통해 이를 소개받게 되었고 함께 좌경 의식화 교육을 받게되었다.
문이 가까이 지냈던 김모양을 버리고 김은숙과 밀착하게 된 것도 김모양의 가정이 자신보다 부유했고 사고방식이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80년9월, 부산시 하단동 에덴공원에서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20대 젊은이들이 모여 남녀 한 쌍을 가운데 두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문과 김의 약혼식이었다. 이들은 학생들 사이에서 『동거한다』느니, 『애를 뱄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약혼식을 올린 것이다.
김은 약혼식전에 어머니에게 문을 소개하며 결혼허락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부산시 괴정 1동 삼풍 맨션아파트 1동101호에 자취방을 얻어 김이 가끔 와 함께 지내곤 했고 의식화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5·17 학생데모와 부마사태, 기타 교내시위 사건 등으로 부산시내의 문제학생들이 대부분 당국으로부터 서리를 맞은 다음에도 이들은 불온서클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고신대학생이라는 것 때문에 당국의 눈길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남아있는 조직으로는 자신들밖에 없다는 생각에 『우리가 행동 할 때다』는 나름대로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이후 문과 김은 점 조직 대상에 나서 이번에 검거된 박원식·최충언·이미옥·김지희 등을 포섭했다.
문은 포섭대상을 편모 또는 편부이거나 가난한 학생 등 어두운 환경의 학생들을 물색했다.
문의 자취방 주인 김지우씨(79)에 따르면 이들이 동거하는 동안 주로 반찬은 3∼4일에 한번씩 김과 이미옥 등이 날라 왔다고 했다. 또 찌개를 끓여 먹는 것도 보지 못했으며 집을 나가기 3일전 이가 인근가게에서 두부 한 모를 사 가지고 와 무우 한 개를 자신에게서 얻어 꼭 한번 끓여먹었다고 했다. <부산=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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