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웅할거 일 바둑계|「천하통일」멀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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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조치훈 명인·본인방이 일본 랭킹 4위인 「십단」타이틀까지 손에 넣어 일본기계는 이제 거의 조치훈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얼른 생각하면 명인·본인방 양대 타이틀 보유자가 이보다 격이 떨어지는 「십단」위 전에 이긴 것은 당연하고 대수로울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력 있는 기사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타이틀전에는 거의 출전하기 때문에 대국상대는 타이틀 크기에 관계없이 언제나 일본 바둑계의 정상급들이며, 타이틀을 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조치훈이 새해 들어 타이틀을 추가했다는 것은 조치훈의 바둑이 그만큼 기량과 저력을 높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단」위는 명인·본인방·기성 등 3대 타이틀에 비하면 상금이나 권위 등 여러 면에서 격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3대 타이틀 다음으로는 가장 큰 타이틀.
20년의 역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상금도 5백만엔이나 된다.
그래서 3대 타이틀에 「십단」위를 포함, 4대 타이틀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 바둑계의 타이틀전은 대소 20여 개를 헤아린다.
이중 앞서 꼽은 4대 타이틀에 천원(신문 3사 연합 주최·상금 5백80만엔), 왕좌(일본 경제신문 주최·상금 4백70만엔), 기성(신문위기연맹 주최·상금 3백30만엔)을 합쳐 7대 타이틀이라 부르며 이밖에 학성전 NHK 배 쟁탈전 조기 선수권 전 NEC 컵 쟁탈전 신인왕전 신예 토너먼트 전 여류본인방전 여류학성전 등이 있다.
조치훈은 지난 2월 이들 군소기전 가운데 학성전에서 우승한바 있는데 학성전은 일본 항공이 주최, 일본 기원이 주관하는 타이틀 전. 상금이 4백만엔으로 기성전보다 많아 전문 기사들이 욕심 내는 타이틀이 되고 있다.
일본 바둑계의 관심은 이제 조치훈이 7대 타이틀을 모두 손에 넣어 천하통일을 할 것인가에 쏠려있다.
타이틀을 여러 개 차지하기로는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에 걸쳐 일 바둑계를 주름잡던 「사까따」 9단. 한때 7개의 타이틀을 쥔 적이 있고 컴퓨터란 별명을 가진 「이시다」9단도 5개의 타이틀을 보유했었다.
조치훈은 아직 이들의 기록에 미치지 못하지만 욱일 승천하는 기세로 보아 이들을 능가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현재 3개 이상의 타이틀을 갖고 있는 기사는 조치훈 한사람뿐이다.
조치훈의 바둑이 날이 갈수록 맛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음은 일본 바둑계의 그에 대한 평가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패장 「오오따께」는 『조치훈은 어떤 바둑에도 자신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집을 짓는데 능한가하면 싸움에도 강하고 이틀이 걸리는 바둑이건 하루에 끝나는 바둑이건 똑같이 잘 두고 있다』고 조치훈을 격찬했다.
작년 말 조치훈의 명인 위에 도전했다가 4연패 한 「가또」9단도 조치훈의 실력이 본궤도에 올랐다고 평가하면서 『「오오따께」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이번 「십단」작전에서 조치훈의 승리를 미리 점친 일이 있다.
군웅이 할거하던 일본 바둑계는 이제 조치훈이란 영걸을 만나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아직도 「후지사와」 기성을 비롯해 「하시모또」왕좌, 「가또」천원 등 쟁쟁한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전도를 낙관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치훈은 작년 가을 「고바야시」9단의 브레이크에 걸려 기성전도 전권을 얻는데 실패했던 일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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