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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되는 북한판 '마셜 플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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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통령 특사로 평양에 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중대한 제안을 전달했다"고 한 뒤 남북관계에 분위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남북 장관급 회담도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담 결과에 고무된 듯 정 장관 자신이 곧장 미국으로 갔다. 이참에 북한 핵문제도 분수령에 도달할 듯한 긴박감마저 보이고 있다.

그 '중대한 제안'이 과연 무엇인지 언론들이 앞다투어 추정 보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현 정부 쪽에서 몇 차례 언급한 용어를 받아 이를 '북한판 마셜 플랜'으로 지칭할 뿐이다. 정부 관계자는 "약 20년에 걸친 대대적인 경제지원 프로젝트"라는 정도로 기본 윤곽만 흘리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로드맵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우리 국민에 대해서만 그 내용이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동영 장관과 4시간50분 동안 얘기를 나눈 김정일 위원장은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협조를 구하러 간다고 했으니, 이제 미국 정부도 그 내용을 알 것이다. 국민에게만 알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본다.

정 장관이 내용은 함구하면서 '중대한 제안을 했다'는 껍데기만 공개하는 이유는 뭘까. 나중에 나올 수 있는 밀실거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김대중 정부 때 비공개로 추진했던 남북 정상회담이 나중에 불법송금 파문이 터지면서 퇴색한 전례도 있다. 내용을 그대로 공개할 자신도 없는 것 같다. 국민의 동의 없이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대한 제안의 기본 윤곽만 보더라도 북한판 마셜 플랜은 잘못된 발상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마셜 플랜을 통해 추구했던 궁극적 목표는 경제부흥을 통해서 유럽에 전체주의가 다시 뿌리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없애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셜 플랜 수혜 국가들은 모두 민주주의 정부였다. 독일.이탈리아 등 패전국에서는 전체주의 정부가 완전히 청산된 뒤 마셜 플랜이 시행되었다. 따라서 천문학적인 원조가 경제발전에 온전히 투자될 수 있는 체제 투명성이 먼저 이루어졌다.

그런데 북한은 현재 전체주의 그 자체다. 대규모 경제원조가 민간경제 발전에 어느 정도 투입될지 지극히 불투명하다. 햇볕정책 지지자들은 통일 이후 비용을 줄이려면 지금 북한 경제를 끌어올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일 후 북쪽 낙후지역에 투자하는 것과 지금 상태에서 북한에 투자하는 것에는 의미와 실효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가 외부 도움을 받아 스스로 개혁하여 민주주의로 전환한 전례가 역사에 없다는 것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정책안을 우리 정부가 북한 측에 제안한 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 '북한 경제개발 20년 계획'을 약속하고 시행하는 것은 비료나 석유를 보내는 것과 그 성격이 다르다. 이 정도 규모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영업자 대부분이 최저생계비조차 못 번다고 정부 스스로 설익은 자영업 진입 통제정책을 내놓았다가 철회한 것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마셜 플랜을 시행할 자원이 있으면 왜 자기들에게 먼저 적용하지 않는지를 그 영세 자영업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국민투표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정당 간 대타협을 통해 국회 동의 절차를 거친다 치자. 그렇다고 그 구도가 20년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20년에 걸친 대규모 지원 약속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정권이 교체되지 않고 정부를 견제하는 장치도 없는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했다가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상대방의 약속 위반에 대해서도 할 말을 못하게 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홍찬 부산대 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