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간가족|세습무당 강원도삼척군근덕면 이 금 옥 씨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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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편도 무당…3남2여>
『네살 먹고 엄마 죽고, 일곱살 먹고 아부지 잃고, 올데 갈데가 전혀 없어 일가친척을 찾아간다. 고모네 집을 찾아 가네‥』
동해안 세습무의 가사 속에는 신명보다 차라리 피맷힌 한이 얼룰져 있다.
굿마당에서 관중을 마음대로 울리고 웃긴다는 세습무당 이금옥씨(60·강원도삼척군근덕면교가리옥계동)는 이같 은 한풀이의 명수. 이씨 자신은 무당의 가사인 신중(신승)타령이나 심청전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했다.
무당이며 기생첩이었던 이씨의 어머니가 11살 때 죽자 눈먼 외할아버지의 손을 끌고 걸식을 나선 것이 고행의 첫 걸음이라고 풀어 놓는다.
동해안을 전전하다 주문진에서 째보라는 별명을 지닌 무당집에 몸을 담게 되었다. 이곳에서 외할아버지는 굶어 죽었다.
이씨는 무당일가를 뒷바라지하며 경문 읽기나 택일법 등 무당수업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무당이었던 이씨는 가무 익히기가 손쉬웠다.
자연히 째보집 외아들과 결혼했으나 남편은 곧 일본에 징용나가 죽고 이씨의 유랑은 다시 시작되었다.
김씨라는 무당과 결혼하는등 전전을 거듭하면서 쌍동이 남매를 포함, 3남2녀의 자녀까지 두었다. 이씨가 근덕에 정착한 것은 30년전. 천박한 무업으로 설움을 많이 당한 이씨는 자녀교육열이 남달리 높았다. 그러나 생계수단으로 무업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씨는 자녀들이 자라면서 또 한번의 설움을 맛보아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무당을 그만두라는 거예요. 맏딸이 어느날학교에서 엉엉울고 오면서 왜 엄마는 무당같은 것을 하느냐고 따지고 들기도 했어요』

<굿신명으로 설움풀어>
어머니에 대한 불만은 아래로 내려 가면서 더 심해졌다. 자녀들은 무당소리만 들어도 이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현재 대도시에 나가 있는 맏딸은 『결혼을 어떻게 하겠느냐』며 간호원이 되었다. 올해 30살인 맏딸은 이제 어머니를 이해하고 곧잘 집을 찾아 식구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멀리 외국으로 떠나고 싶다는 맏딸이 이씨의 가슴을 아프게만 한다. 막내딸은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무당수업을 받긴 했으나 곧 오빠들이 가까운 도시로 데려가 버렸다.
현재 이씨와 함께 살고 있는 자녀는 2남인 김한결씨(25) 내외와 손녀, 그리고 이씨가 데려다 호적에 올려 키워주고 있는 고아 4명.
해난사고가 많은 동해안이어서 그런지 굿마당에서 이씨는 고아와 곧잘 마추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 이들을 데려다 키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두명의 양녀를 교욱시켜 시집보낸 이씨는 이제이들 고아를 양육하는데서 보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풍어제며 수살굿(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굿)등 굿마당이 많이 벌어지는 동해안 일대에서 이씨의 굿은 유명해 그동안 수입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돈벌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내 설움을 신명들여 풀어내지 않았으면 그동안 견뎌내지 못했을 거예요』
워낙 슬픈 운명을 타고 나와 설움이 많았고 자녀들에게서 조차 백안시당했을 때는 그 설움을 춤과 노래의 절정감으로 풀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씨의 설명이다.
『옛날부터 무당은 무당끼리나 결혼하여 가업을 이어을 수 밖에 없었지요. 애들의 아버지 김무당도 5대째 무업을 이어받은 무당가문입니다』
경기도 지방에 흔한 강신무와는 달리 동해안 지방에는 대대로 이어오는 세습무가 압도적이다. 현재 동해안에서 활약하고 있는 세습무당은 어림잡아 8개패. 삼척의 이금옥씨 패와 구룡포패, 울진패, 삼율패, 영해패 등으로 나뉜다. 이들 가운데 과반수가 김씨무당의 후손이거나 인척들이다. 따라서 이씨의 시집식구중에는 무당이 태반을 차지한다.
지금은 무당도 귀해서 판로 다툼은 흔치 않다. 그러나 20∼30년 전에는 무세를 넓히기 위해 남자무당이 지방 여러곳에 무당첩을 두는 수도 있었다고.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 역시 심했었다는 이야기.
『무당의 자녀 가운데는 무속을 세습하는 자녀와 집을 떠나 도시에서 공부하는 자녀등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강신 무당에게 전수>
근대화 물결에 따라 무당의 모습이 차차 자취를 감추어 감에 따라 무업을 이어받는 자녀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자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게 뒤었다고 이씨는 설명한다.
동료 무당의 자녀 가운데 서울로 나가 아예 부모와 인연을 끊어 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이씨 자신은 자녀복이 있는 편이라고 했다. 아들 한 사람 외엔 모두 집을 떠나 다른 고장에서 살고 있지만 집에도 자주 들를 뿐더러 나이가 차면서 차차 어머니의 입장도 이해해 가고 있다는 것.
얼마전엔 강능에 있는 박씨무당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해 무속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높아진 것을 이씨는 무척 다행스럽게 받아 들이고 있다. 가끔 서울이나 지방의 남녀대학생들이 찾아와 말문(가사) 읊는 법이며 춤추는 법을 배워간다.
그럴 때마다 이씨는 새로운 보람을 느낀다.
이씨는 지금도 한달이면 보름넘어 집을 떠나 산다. 밤새워 12석(부정굿·서낭굿·조상굿·가문굿·지신굿·성주굿·세존굿·구농굿·장수굿·손님굿·재명굿·용왕굿)의 굿을 모두 뛰고 나면 이씨 자신도 후련할 뿐더러 각종 재액을 막기 위해 굿마당을 마련한 당사자들도 함께 후련함을 느끼게 된다.
비록 자식에게는 전수하지 못했으나 이씨는 강원도명주군 옥계면에 있는 김순난(42)이라는 강신무당에게 자신의 무속을 전수해 주고 있다. <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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