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서 첩보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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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88특별여단은 정치학습과 전투훈련만을 하는 군관학교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찰임무가 주어진 전투부대로서 41∼45년 사이에 소부대활동 또는 소조활동이라는 적정탐지과업을 수행했다.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4∼5명의 소조로 적의 후방 깊숙이 잠입, 일본군의 배치및 이동상황등을 무전으로 연락했다. 따라서 적후방에 장기간 잠복, 주민들속에서 생활하면서 첩보활동을 하는 것등이 주요전투과업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이같은 첩보활동을 제88여단에만 맡기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많은 소련출신 한국인들을 만주와 한국에 파견, 첩보활동을 시켰다. 그러나 그가운데서도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45년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무사히 공작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과 부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박창옥도 성공한 지하공작원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몸에는 아직도 일본군의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있다. 그는 소련에서 조선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선동연설에는 재능이 있었다. 동만과북만에서 잡역의 계절노동자로 변장, 활동한 그는 때로는 농아짓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봇짐을 짊어진 상인노릇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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