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듣고 임용알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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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같은 윤씨의 회고는 역시 비서였던 박용만씨(전국회의원)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박씨의 전장관 기용에대한 부연설명.
『해방이 되자 갖가지 단체가 속출하여 사회혼란만 가중시키게 되자 청년·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통합을 결의하고 45년12월10일 민족진영의 19개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독촉청련)을 결성했습니다. 초대위원장에 전진한, 부위원장에 유진산(전 신민당총재), 이찬우(전노동청장)씨가 선출됐고 김기철(현민정당의원) 손권배(전국회의원) 김종회 (전 국회의윈) 씨등이 간부가 됐습니다.
나는 조사부를 책임맡았고요. 독촉청련은 해방후 처음으로 전국적 조직을 가진 청년단체였는데 전씨는 독촉청련을 키운뒤 노동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전씨는 민족진영의 순수한 노동단체인 대한노총위원장으로 좌익노동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평) 에 맞서 싸웠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실망이나 비관을 않고 너털웃음으로 때워 넘긴 전씨였지만 이박사를 자주 찾아가지도 않았으며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감투나 얻어쓰겠다고 이박사를 찾을 전씨는 아니었습니다.
전씨의.사회부장관기용은 유진산씨의 추천과 윤석오비서의 적극적 지지밑에 된것으로 압니다. 첫 국무회의가 중앙청회의실에서 열렸을때 참석한 전장관의 모습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양복은 독촉청련위원장때부터 입고 다니던 것이었고, 구두도 그때 신던 낡은것 그대로였고, 하늘로 치켜올라간 와이셔츠 칼러에 홀쳐맨 쭈글쭈글한 넥타이까지도 옛날에 매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장관이 됐으면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모습은 오늘의 사회풍조에 비춰볼때 새삼 느껴집니다.
이대통령은 l차로 4부장관만을 임명발표해 반응을 살폈다. 조농림에 대해서는<참 잘했다>는 칭찬도 있었지만 일부에선<좌익하던 사람을 뭘 믿고 농림을 맡기느냐>해서 이화장은 물론 그 추천자로 알려진 윤석오비서집에 청년들이 몰려가 항의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민당도 내심으론 씁쓸해 했지만<균형이 잡혔다>는 세평에 따라 별다른 이론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의 장관인선에선 곡절과 변동이 많았다. 발표는 보류했지만 사실은 이미 외무 조병옥, 문교장면이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내무장관 문제로 이 인선전체가 뒤바뀐다. 이런 변동때문에 안호상 문교는 공식발표후에야 당사자를 불러 통고했다. 이에대한 안호상씨(현학술원회원)의 회고.『48년8월 초순, 집밖에 나가 놀던 딸아이가 뛰어들어오며 웬 청년들이몰려온다는 거예요. 나가보니 서울대보전 제자들인데<장관이 되신 것을 축하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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