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9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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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독방에서 삼 년여를 보내면 제일 먼저 낱말들을 자주 잊어버리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하루에 입으로 뱉어내야 하는 기본적인 단어들이 있는데 고작해야 담당 근무자와 한두 차례 몇 마디 문장을 주고받으면 끝이다. 자주 쓰지 않으면 무엇이든 퇴화한다. 독거 수용자의 특징은 말하는 기능이 제일 먼저 떨어지는 데에 있다. 위기를 느끼고는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 자신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단어들을 자꾸 까먹는 이런 무렵에 웬 아줌마가 꿈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아줌마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진에 검은 잉크를 칠해 놓은 것처럼 얼굴이 시커먼 어둠에 가려져 있다. 그녀가 옥문 앞에 서 있다가 웃기도 하고 말도 걸면서 내 차가운 담요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와 자고 나서 새벽녘에 소스라쳐 깨면 어쩐지 기분이 개운치를 않고 스스로 불가사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첫사랑의 여인도 아니고 옥내에 굴러다니는 잡지에 숱하게 나오는 여배우도 아닌 하필이면 펑퍼짐한 몸집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아줌마가 나를 찾아온다는 게 오히려 보통의 꿈같지가 않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운동시간에 나아가 청소를 맡은 장기수들에게 묻게 된다. 그들은 대개 십여 년 이상의 중형을 받은 모범수들이었다.

- 요즈음 꿈에 웬 아줌마가 자주 나타나데. 형씨는 그런 일 없어요?

- 아, 그 아주머니? 형기 사오 년 지나구 나면 나타나지.

- 얼굴은 안 보이던데.

- 재미 좀 보시겠군. 그거 아마 여기 터주일 거요. 장기수들은 다 알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데 어쩐지 안심은 되면서도 께름칙한 느낌은 더욱 심해진다. 꿈에 나는 이 감옥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수많은 방과 복도와 중간 차단문이며 철창을 지나 헤매다닌다. 그러다가 저 어두운 복도의 끝 어두운 층계참 아래 시외버스 터미널의 매점 같은 곳을 발견한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서면 얼굴없는 그 여인이 가게 주인으로 나타난다.

- 여기 밖으로 나가는 문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물으면 여인은 너털웃음을 웃는다.

- 아직 멀었는데 뭘 벌써 나가려구 그래. 나하구 좀 더 살다 가지, 깔깔깔.

석방되어 나온 뒤에 나는 못내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느 날, 깊은 밤에 당시의 체험을 녹여서 몇 줄의 문장을 쓰다가 나는 소스라치며 깨달았다. 그녀는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혼자 갇혀 있던 장기수들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상대는 제각기 어머니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견디어내야 할 고독 속에서 마지막 여인을 불러내면서 깊은 내면 속에서 '헛것'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전장에서의 내면화된 상처들은 이미 정리한 물품 상자처럼 단단히 포장된 채 기억의 지하실 밑에 쌓여 있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도 푸른 색으로 빛나는 통통한 몸집의 커다란 똥파리가 진저리나게 무섭다. 꿈에 그것은 거대한 커튼의 그림자처럼 햇빛을 가리고 창문가에 앉아서 윙윙댄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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