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의 정치Q] 정치인 김우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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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 정치전문기자

수십조원을 꾸미고 빌렸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 그의 인생에는 '1992년 신당 이야기'도 있다. 12월 대선을 앞둔 8월 초 서울 시내 힐튼호텔에 있는 전용실. 김 회장은 경기고 후배인 민자당 P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P의원, 내가 가지고 있는 대우 지분을 모두 팔거야. 나 대우 포기한다. 그 돈으로 당 만든다. 정치를 해야겠어. 나하고 같이 하자." 김 회장은 거침이 없었다. "나 사람 많이 만났어. 여도 야도…. 학자들도 만났어. 자신이 생겼어. 의원 60명 정도는 모일 것 같아. DJ 민주당에서 30명, 정주영씨의 국민당에서 6~7명, 나머지는 민자당하고 무소속이야. "

P의원은 물어야 할 걸 물었다. "아니 그러면 대선에 나가시는 겁니까." 김 회장은 답했다. "아니야. 내 욕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야. 기업으로 재계에 큰 성취를 이뤘으니 이젠 정치로 역사에 기여하고 싶어. 왜 독립운동 했던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씨 있잖아. 그 분을 내세울 거야. 그가 당선이 안 돼도 우리 당은 2당으로 버틸 수 있어. 얼마나 멋진 일이야."

P의원은 며칠 후 기자에게 이 얘기를 전했다. 기자가 반신반의하자 그는 "김 회장이 하도 진지해 나도 내내 놀랐다"고 했다.

모든 것은 몽상(夢想)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신당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대신 이종찬씨의 새한국당에 업혀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공허한 야망이었다. 10월 29일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그는 부하 사장들에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대전의 호텔에 묵고 있던 김영삼(YS) 민자당 후보를 찾아갔다. 양김 정치를 비난한 것을 사과하려 한 것이다. YS는 만나주지 않았다.

92년 신당 추진은 그의 인생에서 위험한 방황이었다. 총수가 정치인과 어울리면서 정당 총재와 대통령의 꿈을 꿀 때 그룹은 거액의 장부를 분식(粉飾)하고 있었다. 허약한 거인 대우는 정치라는 대마(大麻)밭 근처에 갔다가 취해 비틀거리고 말았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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