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비 가는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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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유안진(1942~ ),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기니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듣기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가는 소리에 더 귀가 밝은 것은 시인의 연륜 때문이리라. 젊은 날은 누구나 내게로 오는 것들만이 눈에 띄게 마련이다.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진다. 하지만 나이 들면 나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내게로 왔던 것들도 떠나게 마련이다. 눈에 밟히는 그것들.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그렇게 젊음도 사랑도 시절도 기회도 가고 또 가는 것이다. 부른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물끄러미 그 뒷모습 바라볼밖에….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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