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35. 영원한 이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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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단 사회자로 일할 때 스카프와 안경으로 잔뜩 멋을 부린 필자.

홀아비 신세였던 나는 서울 필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을지로 스카라극장 앞에 있던 카나리아다방으로 갔다. '꾀꼬리 가수의 원조'로 불리던 신카나리아씨가 운영하는 다방이었다. 당시 카나리아다방은 일종의 아지트였다. 극장에서 일하는 가수와 배우들이 모여 정보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내던 사랑방이었다.

나는 다방 쪽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다방 건너편에는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였다. 그리고 앞에는 근사한 양옥이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멋진 집으로 이사를 오는군.' 속으로 생각했다. 다방으로 들어가려다 힐끔 쳐다봤다. 웬 여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로 변으로 가서 자세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낯이 익었다. '설마…. 아닐 거야, 설마'. 서둘러 길을 건넜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앗! 삼룡씨."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김화자였다. 나의 첫사랑. 왕십리 판잣집에서 핏덩이를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사라졌던 화자. 연구생 시절 내게 큰 위안이었던 화자.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아쉬움과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 바로 화자였다. 그가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우린 카나리아다방으로 갔다. "살아있었네." 나의 첫마디였다. 밤새워 물어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궁금증이 내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내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죽지 않고 살아있었네"라는 말만 다시 나왔다. 그는 여전히 예뻤다. 아주 곱상한 귀부인이 돼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왕십리를 떠난 뒤 연예계도 떠났어요." 떠돌이 지방 극단을 그토록 수소문해도 그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지금은 결혼했어요. 아이도 있고요." 남편은 건축가였다. 나도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됐다. 가끔 카나리아다방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물었다. 애틋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는 유부녀였다. 우리는 더 이상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리고 두 달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카나리아다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신카나리아씨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얘기 들었어? 화자가 죽었다는군." "네?" " 글쎄, 암에 걸렸었다지 뭐야." 믿기지가 않았다. 자다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겐 금목걸이가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급할 때 팔면 돈이 된다"며 걸어준 것이었다. 왕십리 시절, 나는 그걸 화자에게 주었다. 화자는 갓난아기를 남에게 줄 때 그 목걸이를 아기에게 걸어주었다고 했다. 구슬 모양의 금덩이가 실 끝에서 대롱거리는 예쁘장한 목걸이였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그 목걸이를 아직 간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김화자, 그는 두 번이나 내 곁을 떠나며 내 가슴에 큰 멍을 남겼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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