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의 색다른 세상] 일본 맥주의 색깔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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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나라에서 색깔 전쟁이 있었다. 바로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제 대국 일본에서 웬 색깔 전쟁이냐고 의문을 제기하겠지만 바로 경제대국다운 '컬러 마케팅' 전쟁이었다. 일본의 맥주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기린 맥주와 아사히 맥주의 한판 승부였다. 일본에서 최근 몇 년간 기린 맥주와 아사히 맥주의 컬러 전쟁만큼 화제가 된 사례는 없다.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은 바로 컬러의 왕자인 빨강이었다. 아사히 맥주는 강렬한 빨강을 선택해 만년 2등이던 아사히맥주를 기린맥주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바로 '아사히 혼나마(本生)'이 폭발적 히트 상품이었다. 가격이나 맛에서 화제가 됐을 뿐 아니라 빨간색을 강조한 결과였다. 병맥주 시대로 돌아가 보자. 갈색 병에 갈색 음료, 라벨도 빨강이나 파랑보다 기린의 갈색이 가장 경쟁력이 있었고 기린 병맥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일본에서 맥주 하면 단연 기린이 됐다.

그런데 '병'에서 '캔'으로 이동했다. 컬러가 갈색에서 은색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이른바 드라이 맥주가 등장했다. 기린은 갈색에 집착, '드라이'의 맛을 갈색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고심하고 있었다. 갈색 병과 잘 어울렸던 기린의 라벨 컬러가 캔과는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아사히 수퍼드라이'는 은색과 검은색을 내놓았다. 기린을 제치고 우위에 올라섰음은 물론이다.

생맥주의 경우는 지금까지 있었던 회사의 이미지와 맛에서 격차가 없도록 고심하면서 기업이미지와 경쟁력을 고려하여 색깔을 선택해야만 했다. 아사히는 빨간 바탕색에 하얀색 문자 Asahi를 새겼다. 소비자들도 호의적으로 따라왔다. 신문이나 TV 광고도 빨간색으로 갔다. 소비자들에게 '생맥주는 빨강이다'를 인지시켰다. 유목성이 높은 빨강은 반응도 선명했다.

그러나 기린 맥주의 반전도 만만치 않았다. 기린 맥주 '나마구로(生黑)'는 흑맥주의 색을 그대로 캔의 색으로 재현하였다. 어둡지 않고 붉은색을 띤 갈색. 이 초콜릿 브라운은 정통적인 기린 맥주의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참신한 맛을 풍겼다. 엄청나게 쓴맛, 단맛, 뛰어난 맛을 전하는 색깔, 역시 캔의 색은 맛을 배신하지 않고 소비자들을 파고들었다. 컬러로 인해 거대한 일본 맥주시장에 엄청난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기린 맥주의 독주는 일본 맥주시장에서 종지부를 찍어야만 하였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암반수를 앞세운 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이 그 당시 부동의 1위였던 다른 맥주회사를 제쳤듯이.

이렇게 컬러 마케팅 전쟁에서 보듯이 색과 맛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색은 곧 미각으로 연상된다. 말을 바꿔 쉽게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단것을 매우 좋아한다. 아이들은 단맛을 곧 빨강이나 분홍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먹거리 색은 빨강이나 분홍이 주류다. 반대로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처럼 대체로 약은 쓴 맛이다. 아이들에게 쓴 약을 먹이려고 고생하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에게 먹이는 약을 단맛을 느끼게 하는 빨강이나 분홍으로 해보자. 시럽은 물론 알약 캡슐도 빨갛고 둥근 모양으로 하면 맛있게 보일 것이며 아이들에게 쓴 약을 먹이는 어른들의 고생도 그만큼 덜어질 것이다.

이상희 컬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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