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357>|<제 76화>화맥인맥 월전 장우성(76)|충무공 영정싸고 잡음

정읍군 직윈에게 이당(김은호)선생에게도 영정제작을 부탁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당 선생쪽에서 안 하겠다니까 내게 매달렸나 싶어 기분이 언짢았다 .
하지만 이미 계약을 체결하고 작품도 제작중 이어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 충무공 영정은 처음부터 화료에 관계없이 내가 좋아서 택한 일이기 때문에 누구를 수원수구할 수도 없었다.
다만 「말로써 말이 많은 세상」이어서 선생그림을 뺏어 그린다고 또 남의 입초시에 오를까 그게 걱정이었다.
정읍군에서는 봉안예정일이 11월5일이라고 뻔질나게 재촉전화가 걸려와 미국전시 작품을 제쳐놓고 충무공 영점에만 매달렸다.
심헐을 영정제작에만 쏟은 덕인지 작품이 무던히 되어갔다.
영정이 완성되어 표구를 해준 상문당사장 우강(박봉환)과 함께 기차에 싣고 정읍에 내려갔다.
당일로는 되돌아 올 수 없어 정읍에서 하루를 묵을 수 밖에 없었다.
우강이 모처럼 시골에 내려가니 홀가분한 기분으로 술이라도 한잔 할양으로 김제에 있는 동양화가 벽천(나상목)을 불러냈다.
목포항 기차가 이리역에 멎었을 때 벽천이 웬 사람과 함께 올랐다.
수인사를 해보니 벽천과 동행한 사람은 전주에서 표구사를 경영하고 있는 임종석씨였다.
정주읍에 내려 이충무공 영정을 정읍군청에 인계하고 나서 여관부터 정했다.
나·우강·벽천·임씨 네사람이 여관에 앉아 담배 한대씩 피우고 있는데 정읍군 담당과장이 찾아왔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우리일행을 정주읍에서 제일 잘 한다는 음식점에 안내했다.
반주로 마신 술이 몇순배 돌아가자 과장이 『이자리에 화가양반이 두 분이나 계신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화가 험담 같지만 한마디 해야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도청에서 소환, 들어가 봤더니 도지사가 『무슨일을 그렇게 하느냐』고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었다.
『이당과 월전은 사제지문인데 그래 선생이 그리는게 좋겠느냐, 제자가 그리는게 좋겠느냐』고 힐문하면서 『당장 월전을 취소하고 이당에게 시키라』고 했다.
그래 이 과장이 어처구니 없어 도지사 앞에 서서 자초지종을 말해 김인 지사도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전했다.
과장이 말한 자초지종은『이당·월전에게 똑같이 공문을 보내 충무공영정제작을 의뢰했는데 이당쪽에서는 전주사는 친구 유당(김희순)이 직접 내려와 돈이 적어 못그리겠다고 파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 월전에게 부탁했는데, 월전이 제작에 착수하고 있을때 그 분이 다시 찾아와 5만원에라도 하겠다고 해서 이미 계약을 체결했으니 안된다고 거절했지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5만원도 받지 않고 그려 주겠다고 사람을 보내와 아무리 공짜로 해줘도 정읍군에서는 일의 성질상 그냥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는 내용이었다.
도지사가 과장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정읍군에는 잘못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얼마 전에는 또 지방유지에게 부탁. 군수에게 압력이 들어왔다』고 과장이 몹시 흥분해서 얘기했다.
그때서야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싶어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전주에서 내려온 임종석씨도 『전주에서는 이당 선생이 그릴 것을 월전이 뺏어서 한다』고 나쁘게 소문이 나있었다고 실토했다.
임씨는 『여기 와서야 일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면서 『전주에 올라가면 월전선생의 누명은 벗겨드리겠다』고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술김에도 처음에 내가 걱정했던 일이 적중했구나 생각하니 세상인심이 야속하게만 여겨졌다.
벽천과 우강도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내게 자꾸 술을 권해 애꿎은 술만 실컷 마셨다.
내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선생 그림을 뺏어 그렸다는 소문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한편으로는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후 정읍군에서 충렬사에 이충무공 영정을 봉안한다고 작가참석을 요청해 왔지만 미국갈 준비때문에 못 내려 갔다.
훗날 풍변에 이당 선생이 충무공영정을 그려 가지고 정읍군에 내려가 기증했다고도 하고, 아산 현충사에 가서 충무공 종손 이응렬씨에게 주어 울돌목 사당에 봉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금 그 그림이 어디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