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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통합, 앞으로의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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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6~17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실패로 끝났다. 유럽의 앞날은 더 분명해지고 있는 동시에 더 어두워지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유럽헌법을 부결시킨 2005년 5월 29일과 6월 1일은 21세기 역사학자들에게 유럽이 전환점을 맞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989년 11월 9일만큼이나 역사에 확연히 새겨질 것이다. 유럽 통합의 모태가 됐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두 나라에서 유럽헌법이 부결된 것은 전후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전후 시대의 특징은 유럽에 평화와 번영과 자유를 가져왔던 EU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인 대다수가 유럽통합이라는 대의명분에 공감했다. 그러나 유럽헌법에 반대표를 던진 두 나라의 젊은 세대에겐 평화나 자유보다 높은 실업률이 더 현실적 문제였다.

5월 29일의 사건은 유럽인에게 반성과 경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결과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최근 독일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도 만약 유럽헌법을 국민투표로 비준한다면 독일 국민 대다수는 유럽헌법에 반대표를 던지겠다는 것이었다(독일은 의회에서 비준한다). 비준 절차를 강행하는 것은 유럽인의 매저키즘과 맹목적 태도, 거만함 등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헌법안이 부결된 이유는 EU를 둘러싼 좌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국내적 요인 탓이 크다. 그러나 부결됐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하고 지나간다면 '통합'이라는 EU의 대의명분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각국 정부로부터 국민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반성과 경청을 위해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는 얘기지, 현 상태를 그대로 놔두라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유럽은 세 가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첫째는 헌법 부결로 유럽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 외교 정책을 따로 떼어내는 것이다. 유럽이 미국.중국.러시아 같은 나라로부터 수동적이며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에만 여념이 없는 존재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직함이 무엇이든 각국 외무 담당자들은 유럽을 집어삼킨 정치적 허리케인에서 한 발 떨어져 있어야 한다. 국제사회를 향해 뭔가 정치적 의지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둘째는 경제.사회 분야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첫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행동안이다. 독일.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노동 시장.복지.예산 등의 개혁을 충분히 수행하지 않았다. 이 숙제가 끝났을 때만 유럽은 현재 처한 불구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내무장관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복지 모델을 현실화해야 한다.

셋째는 유럽헌법 부결이 비록 EU 확대에 대한 부정적 반응으로 빚어진 결과로 볼 수 있지만, 유럽 지도부는 EU 확대라는 대의명분을 용기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EU 확대는 유럽의 가장 위대한 정치적 승리지, 유럽의 가장 큰 경제적 재난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탈지역화는 유럽화가 아니라 세계화의 산물이다. 유럽의 노동시장에 가장 큰 위협은 폴란드 배관공이 아니라 중국.인도의 노동자다.

EU 확대는 불가리아.루마니아 등 이미 가입이 확정된 국가는 물론 발칸반도 국가까지 아우르는 식으로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가령 터키 같은 경우와 관련해 유럽인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유럽을 늘 당연한 존재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난 50년간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들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역사와의 약속을 계속 잊어버린다면 EU는 좀 더 역동적이고 야심만만한 경쟁자들에게 추월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도미니크 모이시 국제관계연구소(IFRI) 고문

정리=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