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외교 "폭정 발언 미국에 유감"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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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1일 미 행정부 고위 관료의 발언에 대해 '공개 경고장'을 보냈다. "당분간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부르지 말라"는 내용이다. 폴라 도브리안스키 미 국무부 차관이 20일 워싱턴의 한 민간 연구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거듭 예시한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서다.

매우 신속하고도 이례적이다.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동맹 국가인 미국의 고위 당국자를 향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거의 비슷한 시간에 똑같은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만큼 우리 정부가 이번 발언의 파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다.

정부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6.17 평양 면담을 통해 북핵 문제에서 대화의 모멘텀(분위기 또는 동력)이 드디어 확보됐다고 판단했다. 20일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엔 주재 북한 고위 관계자가 "미국이 더 이상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면 7월 중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제안까지 내놨다. "한 달만 안 쓰면"이라거나 "뉴욕 접촉 파트너인 조셉 디트라니 6자회담 미국 측 차석대표보다 상위의 관리가 그 단어를 쓰지 않으면"이란 구체적인 단서까지 달았다. 2.10 핵 보유 선언 이후 북한이 내놓은 복귀 조건 중 가장 최소한이면서도 구체적이다.

정부는 이 같은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나가 어떻게든 6자회담을 재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런데 북한 측이 유일하게 삼가달라고 했던 그 발언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미 행정부 고위 관료가 또다시 거론한 것이다. 더욱이 이런 민감한 때 그 단어를 꼭 집어서 말한 것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의 반발이 표면화되기 전에 서둘러 발언의 파문을 진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정 장관도 이날 저녁 남북 장관급 회담 북측 대표단 환영 만찬에서 이 같은 우리 정부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 당국자는 전했다.

이 같은 강경 대응 방침에는 우리 정부의 '주도적 역할론'도 자리잡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 세웠던 북핵 관련 3대 원칙 중 북핵 불용과 평화적.외교적 해결 원칙은 관련국들과 어느 정도 공유돼 왔지만 우리 정부의 주도적 역할론은 아직 공론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6.17 면담을 계기로 드디어 가능해졌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면담 직후 한반도 주변 4강에 정부 고위 관료를 급파해 면담 결과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날의 유감 표명이 결코 미국 정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분명히 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기자 간담회에서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 등 공식 라인에는 이미 충분한 설명을 했고, 인식을 공유한 상태"라며 "이번 발언은 북핵 문제와 전혀 연관이 없는 관료가 한 것으로, 미국 정부의 입장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당국자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19일 발언에 대해서도 "질문이 그렇게 나오면 달리 답변할 수 있겠느냐"며 "미국 측에서 이미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는 뜻을 밝혀왔다"고 말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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