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미래를 여는 데 미흡했던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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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제(20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 정상회담은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 역사상 중요한 회담이고 그 의의는 사뭇 중대하다. 회담은 조심스럽고 무난하게 끝났다. 가시적인 성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두 가지 '낮은 수준의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제2기 역사공동연구회를 발족하고 그 산하에 교과서위원회를 신설해 역사교과서 문제를 다루기로 한 것과 야스쿠니신사 이외의 제3의 추도시설 건립을 일본 여론 등을 감안, 검토한다는 것이다.

가시적 성과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정상회담의 또 다른 의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서울을 방문해 노 대통령과 직접 의견을 교환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양국 간 감정의 앙금을 감안할 때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악화된 한.일 관계가 우호협력관계로 회복되는 방향 전환의 시그널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의미는 북핵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 한.일 협력의 중요성이 재인식됐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일 관계의 주요 쟁점은 독도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식민지시대 피해보상 문제, 국교 정상화의 미진한 문제, 북핵 문제, 자유무역협정 체결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한.일 관계가 최근 대립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국제정치적 환경에 따라 국내정치적 요인의 변화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정책을 추진하는 고이즈미 총리와 자민당 보수우익세력의 역사인식은 일본이 과거사를 통해 동아시아에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이미 전부 사과하고 반성했으므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래의 강한 일본을 건설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경제대국에 걸맞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국익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끄러운 과거는 덮고 그에 따라 역사교과서를 수정하고, 영토 회복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독도에 대해 영토분쟁지역을 선언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일본의 패권 경쟁을 위해 전몰한 조상신을 모시는 장소에서 일본의 국가정신을 가다듬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고,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보수우익 성향의 정치가들이 지속적으로 참배하고 있다. 일왕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정치시스템에서 보수우익 정치가들이 일본을 이끌어 가는 한 현재 두드러지고 있는 역사 인식과 영토 문제 등에서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한.일 관계의 쟁점 중에서 경제 협력, 문화 교류, 자유무역은 계속 추진하고 한.일 우정의 해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원칙이다. 식민지 피해보상 문제와 국교 정상화의 미진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장기적인 과제다. 북핵 문제를 위한 협력은 한.미.일 공조의 틀 안에서 계속 논의되고, 북.일 관계의 개선도 기대해 본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따르는 일본의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은 북.일 관계 정상화 이후 따라올 사안으로 북한의 경제 재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독도 문제와 역사교과서 문제는 사안별로 장기적으로 논의돼야 하고, 한.중.일의 역사공동연구는 매우 중요한 움직임이라고 하겠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일본의 전직 총리들이 집단적으로, 심지어 보수우익의 유족회조차 자제하기를 당부하는 사안이다. 일본에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전직 총리들이 자제해 온 참배를 고이즈미 총리가 무리하게 지속하는 것은 근린우호외교에 악영향을 주는 국제 문제로서 일본 내 문제라는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 일본이 공언했듯이 수차례 과거사에 대해 주변국에 사과했다면, 일본 지도자들은 더 이상 망언을 하지 말고 신사참배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면서 평화를 다짐한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말에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주변국에 대해 일본은 다시는 패권주의로 나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일본의 지도자가 과거회귀적 국가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일원이라는 개방된 역사 인식에 기초해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수직적 의식구조를 떨치고 이들을 새 시대의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김성철 세종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