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8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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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중에 일본에서의 자세한 경과 과정이 나오겠지만, 하여튼 뒷날 이와나미 출판사의 사장이 되었고 당시에는 월간지 '세계'의 주간이었던 야스에 료스케 선생의 주선으로 일본 지식인들의 나를 위한 모임이 이루어졌는데, 그때에 노마 히로시 선생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노마 선생은 일본 문단의 몇 안 되는 원로 중 하나였는데 나를 만나자마자 공손히 큰절을 하며 말했다.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일을 용서해 주시오.

나도 얼결에 당황하며 큰절을 했다. 그것은 선생이 나 개인과 사회를 동일하게 대하는 예의였다고 생각했다.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일본에 체류하던 그 몇 달 동안 수많은 '일본 시민'을 발견하게 된다. 노마 선생은 뒤에 나의 일본판 '무기의 그늘' 출판 기념회에서 축사도 했는데 내가 감옥에서 석방되던 무렵인 98년에 작고했다.

베트남의 작가 바오 닌을 만난 자리에서 나와 우리를 이제는 '아시아의 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인이건 베트남인이건 또는 어느 다른 아시아 나라의 사람이든 피차에 민족주의적으로 서로를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바오 닌은 나보다 몇 살 손아래로서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고 한다. 플레이쿠 전선에 있었다니 나와는 지척에 있었던 셈이고 주로 미군과 대적했지만 우리와 조우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군이 플레이쿠 전선에 투입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그는 구정공세 당시에 호이안 시내에 들어와 한국군 해병대와 시가전을 벌였던 월맹군들과 다르지 않았던 '적'이었다. 그는 처음에 편성된 자기네 중대원들 중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은 서너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소설에서도 썼지만 미국과 같은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수없이 인명을 희생해 가면서 자기 소진을 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와 내가 대담을 하던 같은 무렵에 '고엽제'의 피해를 본 나의 늙은 전우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나는 전우들의 불치의 병증과 자녀에게까지 대물림된 고엽제의 후유증을 목격하면서, 그 고엽제가 휴전선에서도 뿌려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미국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그리고 한편으론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는데 가해에 대한 비판이 어느 매체에서 제기되면서 참전자들의 울분이 터졌다. 우리는 귀향했던 미군들보다도 더욱 자기가 참전했던 전쟁에 대한 파악을 오랫동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착잡하고 아프기만 했다.

나는 대대에 가서 특교대 이래 짝패가 되었던 추장과 통신병 인수를 다시 만났다. 추장과 나는 함께 상병이 되어 있었고 인수도 병장이 되었다. 추장은 나와 해변의 대대본부 방어 중대에 남아 있었고 인수는 작전 중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느 날 선두를 맡았던 소대가 인원과 보급품 보충을 받으러 본부로 돌아왔다. 그들은 판초 우의에 시신 한 구를 담아 가지고 왔는데 그 피에 물든 살덩이가 바로 인수였다. 그날은 아무 상황도 붙지 않은 평온한 날이었다. 방어 진지에 거의 도착해서 누군가가 유탄 발사기를 멘 채로 오발을 했다. 곧추 올라갔던 유탄이 다시 지상에 떨어지면서 그나마 피했던 인수 근처에서 터졌다는 것이다. 나머지 몇 사람은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전장의 우연은 그렇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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