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데 덮친 'EU 통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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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예산안 합의에 실패한 EU 회원국 정상들. 위로부터 블레어 영국 총리, 슈뢰더 독일 총리,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

유럽연합(EU) 국가들의 갈등과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다. EU 정상들은 16~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2007~2013년 예산안에 대한 합의에 실패했다. 협상 과정에선 감정 대립하는 양상마저 보였다.

유럽헌법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인다. 루마니아.불가리아.터키가 EU에 가입하는 문제도 차질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순번제 의장국인 룩셈부르크의 장 클로드 융커 총리는 "EU가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고 말했다. 유럽합중국의 꿈은 사라지고 민족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 예산안 합의 실패=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제는 2007~2013년 예산안 개편이었다.

프랑스 등 대부분 회원국은 "영국이 EU 예산에서 매년 되돌려 받는 45억 유로(약 6조원)가량의 환급금이 축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1984년부터 환급금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등은 "영국이 그동안 눈부신 경제발전을 했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유럽 10개국이 새로 가입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가 받고 있는 농업보조금을 대폭 축소하지 않으면 양보할 수 없다"며 끝까지 버텼다. 네덜란드와 스웨덴도 자국의 예산 분담금이 과도하다는 문제를 제기해 합의를 어렵게 만들었다.

◆ 유럽헌법 비준 연기=EU 정상들은 16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2006년 11월 예정인 유럽헌법 비준 완료 시한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영국에 이어 덴마크.스웨덴.체코.포르투갈.룩셈부르크 등이 비준 절차를 연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선 유럽헌법안이 부결된 바 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헌법 비준 시한 연기 결정은 블레어 영국 총리의 작품이었다. 블레어 총리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비준을 계획하고 있던 회원국을 설득, 비준 완료 시한을 연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이달 초 유럽헌법 비준 투표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바 있다.

◆ 비난과 분노=융커 룩셈부르크 총리는 "가난한 회원국들이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스스로 자국이 받는 보조금 규모를 삭감하겠다고 제의한 사실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부자나라들의 양보 없는 자세를 비판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동구권 국가들의 양보 자세가 다른 2~3개국의 이기주의와 대조됐다"고 가세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비타협적인 고집 때문에 EU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는 "EU 예산의 왜곡된 지출을 전면 재검토하자"고 주장했다. 영국은 7월 1일부터 6개월간 EU 의장국이 된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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