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8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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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미 접근했던 적들은 사라졌거나 어둠 속에 틀어박혀서 가끔씩 개인화기로 사격을 해 온다. 수색 소대는 천천히 전진하면서 안전 지점을 확보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대개 습격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해방전선의 지방 게릴라들은 항불전 시기부터 싸워 왔던 역전의 고참병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때에나 정치적으로 전 세계에 전쟁의 진행을 알릴 필요가 있을 경우에만 희생을 치르면서 대대적인 공세로 나왔다. 그런 일은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내가 이른바 '적'의 모습을 먼발치서라도 발견한 것은 작전에 나가서 한낮에 수색정찰 중에 꼭 한 번 보았을 뿐이었다. 우리 중대가 소대별로 나뉘어 각 지역으로 투입되었는데 정글을 나서자마자 벼가 푸르게 자라난 논벌이 나왔고 맞은편에 다시 짙은 밀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논두렁 가운데에서 분명히 농부가 아닌 전사 하나가 일을 보던 중이었다. 그가 농부가 아니었다는 것은 검은색의 파자마에 삼각형 농라를 쓰고는 있었지만 탄띠와 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소대원이 논둑에 배치 붙어서 '엎드려 쏴'를 시작했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지그재그로 논 가운데를 달려갔다. 그 많은 총구가 불을 뿜었지만 그는 잽싸게 달아나 어느 틈에 밀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병사들은 총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맞추기가 힘들더라고 두고두고 말했다. '그 녀석 밑도 못 닦았을 거야'라고 농담들을 했지만 상대가 가족과 정다운 벗들이 있는 우리네와 똑같은 젊은이들이라고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적'은 그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증오'의 그림자였다.

근년에 나는 베트남 작가들과 만나고 직접 방문도 하면서 그들에게 사과도 하고 화해도 청하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착잡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박철이와 달리 '목격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베트남 전쟁에 관한 비판적인 작품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맨 먼저 '전쟁의 슬픔'을 쓴 바오 닌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 주간지에서 특집으로 마련한 '아시아에서 다시는 피를 흘리지 말자'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내의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들며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내가 제일 먼저 그에게 큰절을 올리며 사과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던 그는 어리둥절하며 당황했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일본의 선배작가 노마 히로시 선생이 내게 가르쳐준 예의입니다. 저와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는 85년에 내가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서 일 년을 유럽.미국 등지를 떠돌다 일본에 들렀을 때의 일이었다. 오사카에 갔을 때 나의 일정을 맡았던 담당자가 어느 사회단체 사무실에서 원로 작가인 노마 히로시 선생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삼사십 분을 기다렸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히로시 선생은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오게 되었는데 시내로 오는 도중에 차가 밀렸다고 나중에 전해 왔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은 흔한 일이어서 일본과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면 내가 화를 내고 돌아서 버릴 일은 아니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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