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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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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제주도 남쪽 바닷가, 불쑥 솟아 있는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 산방굴사라는 암자가 있다. 수십 년 전 여름 이곳을 터벅터벅 올라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져 여행 중이었다. 굴 앞에 펼쳐진 수려한 해안 절경과 드넓은 바다, 끝없는 하늘을 보고 그는 자신이 이 우주상에서 한없이 작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리고 죽는 것보다 열심히 사는 게 이 광대한 우주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그의 인생은 크게 변했다.

19세기 북미 인디언들은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로 '원생지 체험'이라는 의식을 치렀다. 미성년자들을 깊은 숲으로 혼자 들여보내 열흘 동안 음식도 먹지 않고 자신의 인생 비전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찬 밤바람이 뼛속까지 스미고 온갖 산짐승의 울부짖음이 점차 가까이 들리며 공포가 엄습해 오면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을 눈물겹게 깨닫게 된다. 이 광대한 숲과 자연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며, 이 오묘한 숲과 자연의 섭리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이는 견디기 힘든 육체적 체험인 동시에 숲에서 진실한 자신을 찾기 때문에 영적 체험이다. 이 체험에서 얻은 비전은 그의 인생 지표가 된다.

미국 동부 메인 주로부터 조지아 주까지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주하는 3452km의 등산로가 있다. 14개 주를 관통하는 이 산길은 완주하는 데 최소한 5개월이 걸리지만 해마다 수백만 명이 도전한다. 그러나 매년 겨우 200명 정도만이 성공한다. 광활한 자연 속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문명으로부터 격리된 채, 그저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지루한 걷기만을 반복한다. 종주에 도전한 그들은 완주 여부를 떠나 한없는 영감과 모험심을 배운다. 그 경험이 새로운 인생을 태어나게 한다.

최근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으로 전통적으로 우리가 누려 왔던 자연과의 접촉 기회를 자꾸 잃어 가고 있다. 학자들은 유전적으로 인간은 자연 회귀 본능을 갖고 있어 정신적 안정과 만족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연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녹색의 고요한 숲에 들어서면 더할 수 없는 마음의 안정감과 포근함을 얻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숲이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다. 아파트 단지 내 조그만 숲이 주민들의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숲은 청소년의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숲은 성취감을 맛보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자기도 할 수 있다는 도전과 성취의 자신감을 부여한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외환위기 때 수많은 사람이 갑자기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매며 삶의 의욕을 잃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 중 상당수가 '숲 가꾸기'라는 공공 근로사업에 참여했다. 그때 그들이 말했다. "숲 속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숲은 가족을 화목하게 한다. 숲에서의 캠핑, 자연 체험, 등산 등은 가족 간에 진솔한 대화가 오가게 하고, 자녀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며, 부부 간의 유대를 강화시켜 준다. 숲은 적당한 도전을 바탕으로 자기의 능력을 힘껏 쏟을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정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온 힘을 쏟게 한다. 숲 속의 아름다운 야생화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숲은 우울증을 낫게 한다. 우리나라 성인의 약 15%가 심각한 상태의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한다. 산책.삼림욕 등 숲을 이용한 활동들은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훌륭한 우울증 자연 치료제다. 숲에서는 피톤치드라는 보약이 생성된다. 숲에 가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진다. 숲에서 인생의 진실과 가치를 찾자. 진취적인 국민 기상은 숲에서 나온다.

김형광 국립수목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