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분석] 일본 '압박' 국내 '보험' 노 대통령 양수겸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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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낮 12시5분 청와대 본관 인왕실. 한.미 정상회담 설명차 여야 대표를 오찬에 초청한 노무현 대통령이 불쑥 한.일 정상회담을 거론했다. "한.일 정상회담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떤 주제로 할지 결정되지 않아 고심하고 있다"면서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파문을 불렀다. 당장 이달 20일로 예상되던 회담이 불발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다. 이에 앞서 라종일 주일 한국대사는 13일 오카다 가쓰야 일본 민주당 대표와 만나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불안정한 일이 생기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라 대사는 일이 꼬이는 이유를 '교과서 문제'와 '(고이즈미 총리의)야스쿠니 신사 참배'라고 지적했다. 하루 전인 13일 청와대는 외교부에 14일로 예정된 정상회담 발표를 하루 연기할 수 없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택일까지 한 정상회담이 물건너 가면 파장이 클 것은 분명하다. 한.일 관계의 악화는 물론 동북아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 된다.

그러면 노 대통령은 왜 고심을 했을까. 한 핵심 참모는 "회담에서 뭔가 진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야스쿠니.교과서.독도 등 3대 현안에 대한 일본 측의 '성의'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회담 발표를 6시간 앞두고 나왔다. 그것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라면 외교상 극히 이례적이다. 상대는 '결례'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노 대통령이 이를 알면서도 발언을 '감행'한 데는 두 가지 포석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의 결단을 압박하기 위해서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외교관례를 희생시킨 셈이다. 둘째는 국내용이다. 노 대통령은 회담이 기대에 못 미쳤을 경우에 대비한 '보험'을 원한 것 같다. 발언 장소를 야당 대표들이 참석한 청와대 오찬으로 정한 것에서 감지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정상회담의 성사 여부를 놓고 바깥은 소란스러웠지만 인왕실의 오찬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한.일 관계가 악화돼 있어 이럴 때일수록 정상회담을 통해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많은 도움이 됐다. 참고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찬을 마친 오후 2시30분.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회담에 찬성 쪽이 다수였다"고 브리핑을 했다. 동시에 외교부에서도 "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것"이란 비공식 설명이 나왔다. 오후 6시. 청와대는 20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된다고 공식 발표했다.

최훈.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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