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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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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간을 정확히 재는 게 먹고 사는 일과 직결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때부터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대개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노사 모두 노동시간을 정확히 잴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시계는 노동 시간을 관리하고 임금을 배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됐다.

물론 그 시절엔 시계가 정밀하지 않아 시간 측정이 자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악덕 고용주들은 시계를 느리게 조절해 노동시간을 속이기도 했다. 또 수력을 이용하는 공장들은 시계를 강물의 흐름에 맞춰 조절했다. 물살이 빠를 때는 시계도 빨리 가고, 느릴 때는 시계도 천천히 가는 식이다. 그런데 이게 결과적으론 나름대로 합리성을 지녔다. 물살이 빨라 수력이 셀 때는 생산도 늘어난다. 이에 맞춰 시계를 빨리 가게 하면 임금이 오르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수력이 약할 때는 생산도 감소하므로 시계를 늦춰 임금을 낮춘 것이다. 고용주 입장에선 임금을 생산실적에 연동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고무줄식 시간 측정은 19세기 초 출퇴근 시간제가 도입되면서 사라졌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출퇴근 시각을 기록해 노동시간을 계산했다. 이로써 고용주가 노동시간을 후려칠 수는 없게 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철저히 매이는 신세가 됐다. 이 점에서 시계는 노동자보다 고용주의 편에 섰다고 볼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시계의 역할을 분석한 미국의 사회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시계를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시계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재는 도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나아가 산업혁명의 상징적 기계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며 사는 현대인에게 와닿는 말이다.

얼마 전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회사 앞엔 바늘 없는 시계탑이 등장했다. 시침과 분침이 없어 시계라고 할 수도 없는 문자판이다. 단타매매에 매달리지 말고 멀리 내다보는 장기투자를 하라는 의미로 설치했다고 한다. 투자자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멈퍼드의 정의에 부합하는 시계라고나 할까. 하루하루 작은 출렁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차분히 평상심을 지키자는 뜻인데 그게 어디 주식투자에만 국한된 말이겠는가.

남윤호 패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