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세종과 '지혜'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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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치와 정치인, 특히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불신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국민의 자유로운 투표로 정치 지도자를 뽑는 이 시대에 무작정 그들에 대한 비판과 야유로만 소일한다면 이는 누워서 침 뱉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 뒤늦게나마 국민과 지도자가 함께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워 어떻게 고쳐가야 할 것인가를 겸허히 모색하는 집단적 노력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지혜의 부족이며, 둘째는 국민적 합의의 부족이다. 지혜의 부족과 합의의 부족이 합쳐지면 나라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한글을 만들어 주시고, 과학과 문화를 활짝 꽃 피우게 하셨으며, 조선조 500년 경국치세(經國治世)의 기틀을 닦아 놓으신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바로 지혜를 모으고 뜻을 모으는 데 그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세종은 무엇보다도 널리 지혜를 모으는 기초 작업에 국정의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 지혜를 모은다는 것은 결국 지혜로운 사람을 모으는 것이다. 용기나 소신이나 의욕은 그런대로 중요한 덕목이지만 지혜를 대치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세종은, 특히 그의 부왕(父王) 태종은 정권의 창건 과정에서 아무리 공이 많은 인물이라도 나라의 안정된 운영에 필요한 지혜가 모자라는 측근이라면 대거 권부로부터 잘라 버렸다는 이성무 교수의 설명은 시사하는 바 크다. 나라에 필요한 지혜로운 인재는 과거의 공적이나 인연에 얽매이지 말고 공정한 제도에 따라 새롭게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세종 초기에 있었던 과거에 응시자가 10만 명이 넘었다는 것은 논공행상보다 지혜를 갖춘 새 인물을 공정한 제도에 따라 발굴하겠다는 정책이 실효성과 더불어 국민적 지지를 얻어 국가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종이 지혜로운 인재를 모으기 위해 만든 새 제도의 대표적인 예는 집현전이다. 어질고 지혜로운 선비들을 뽑아 연구와 토론에 필요한 지원과 대우를 아끼지 않으며 그들의 의견과 자문을 직접 국정에 반영시킨 이 제도는 누가 언제 모방해도 좋은 훌륭한 제도다. 지혜로운 사람을 소중히 모시기보다 오히려 멀리하는 권력은 결국 무지의 수렁으로 뒷걸음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집현전과 같은 제도는 엘리트 중심의 국가 운영을 전제로 하며 이를 민주적 대중화 시대에서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은 역시 지혜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과제다. 국가를, 특히 선진 국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필요하다는 이치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엘리트의 양성과 선정 과정에서 평등과 공정의 기준을 혼동하기 쉽다는 데 있다. 엘리트 충원 과정에서 공정성이 의심받게 되면 결국 반 엘리트적 평등주의를 촉발하고 지혜와 지혜로운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이 만연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공정한 인재 등용과 활용은 권력자의 임의적 판단보다는 절차의 제도화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다.

세종은 과거의 제도화로 지혜로운 엘리트의 등용을 제도화했을 뿐 아니라 그 엘리트들이 독선에 흐르지 않고 숙의(熟議)와 경연(經筵) 등 공론(公論)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정책결정절차도 제도화하였다. 박현모 교수가 지적한 대로 세종시대의 외교 문제를 포함한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는 집현전 학사들의 전문적인 식견을 바탕으로 모든 관계 관료들의 충분한 논의를 필수적 절차로 삼았다. 특히 정책에 대한 반대론자의 의견도 충분히 청취하고 토론하는 절차를 제도화한 것은 아무도 지혜를 독점할 수 없다는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바로 국왕 자신이 독선과 독주로 흐를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재상 중심의 정부 운영을 제도화하고 황희와 같은 지혜로운 재상을 오래 그 자리에 앉힌 것도 우리 제도 개선에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에서는 '지혜'라는 말 자체를 듣기 어렵게 되었다. 지혜를 모으기 위한 토론의 문화가 사라진다면 살벌한 분열의 정치 풍토만 남게 된다. 며칠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설립된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지도자나 국민은 세종대왕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다듬기 바란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