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마지막 그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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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대철(1945∼ ), ‘마지막 그분’

7부 능선에서
개활지로 강가로 내려오던 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앞선 순서대로 이름 떠올리며
일렬로 숨죽이며 헤쳐가던 길

그분은 맨 끝에 매달려 왔다
질퍽거리는 갈대숲에서
몇 번 수신호를 보내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속을 한동안 응시하다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함께 가자 위협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손마디를 하나하나 맞추며
수고스럽지만 하다가
다시 만나겠지요 하던 그분
숨소리 짜릿짜릿하던 그 순간에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을까
그게 그분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는데
나는 왜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까

창 흔들리다 어두워지고
천장에 달라붙은
천둥 번개 물러가지 않는다


영화 ‘실미도’는 오랜 세월 강요된 침묵 속에 가려졌던 북파 공작원의 어두운 실상을 적나라하게 충격적으로 증언하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슬픔의 알갱이가 가슴 안에 고여 뭉치는 고약한 느낌에 내내 시달려야 했다. 바닥에 침전된 부토물이 떠오르듯 분단체제가 낳은 비극과 치부의 정체가 하나하나 밝혀지던 순간의 경악을 잊을 수 없다. ‘그분’과의 기막힌 작별 이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시인은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견디고 있다.

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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