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7)|제 76화 화맥인맥(36) 월전 장우성|서울대 미술학부 조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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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되던 해 10월에 서울에 올라와서 나는 집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l년새에 5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맨처음 거처를 정한 곳이 안암동 적산 가옥-.
이집서 내가 기적적으로 국창 임방울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바 있다.
두번째 이사한 집은 서울시청 영선과장으로 있던 정동석씨 집 바깥채다.
정씨 집은 돈암동 삼산교 근처 한성여고 언덕배기 바로 아래 성밑이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있었는데 우리가 바깥채서 살았다.
정씨는 청주사람인데 나와는 그가 경성공업 건축과에 다니던 일제 때부터 아는 터였다.
그는 노래도 잘 했다. 미남자여서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그가 졸업할 때도 나는 학교까지 가 보았다. 그 때는 개나리가 필 무렵이었는데 여간 춥지가 않았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노란 바바리 코트를 사 입고 내게 찾아왔다. 그 무렵에는 바바리 코트가 유행이었다.
정씨는 졸업을 했는데 취직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걱정했다.
얼마후 경성 부염선과에 취직되었다고 내게도 한턱 냈다.
그는 내가 선전에 특선할 때마다 축하한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이 정동석씨 집 바깥채에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교섭을 받았다.
46년 여름이었던가, 근원(김용준)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이때 근원은 보성중학 미술교사로 있었다. 나와는 그저 만나면 인사하고 지낼 정도였는데 갑자기 내 집에 방문까지 해줘 의아스러웠다.
근원은 내방에 들어와서 함께 차를 마시면서도 딴전만 피우고 이야기를 꺼내지 앓았다. 한참 후에 『나하고 같이 어디 좀 가보자』며 어서 채비를 하라고 먼저 나갔다. 나는 옷을 입으면서 궁금해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보면 알테니 어서 갑시다』하고 앞서 대문을 나섰다.
가면서도 어디 간다 소리를 않고 삼선교에서 전차를 탔다.
동대문에서 내리더니 또 말없이 전차를 갈아탔다. 미주알고주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졸래졸래 따라만 갔다. 광화문에서 하차, 휭하니 시청쪽을 향해 걸었다.
서울 시청에 들어서서는 1층 코너에 있는 어느 방 앞에 가서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게 바로 서울시 학무과장 방이었다.
나는 학무과장이 누구인 줄도 몰랐다.
근원이 인사를 시켜서 봤더니 학무과장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초대 미술대 학장을 한 우석 장발씨였다.
우석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와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석은 서울대에 예술대학을 만드는데 미술학부 조직책임을 자기에게 맡겼다면서 최초의 스태프를 구성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권했다.
우석은 근원과 의논했더니, 근원이 『월전과 함께 일하는 게 좋겠다』고 추천했다는 경위를 설명했다.
나는 우석의 갑작스런 제안에 어리둥절해 말꼬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나같이 경험도 없는 사람이 대학교수의 중책을 맡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않고 앉아만 있던 근원이 『사양말고 함께 일해 보자』고 부추겼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인 제안이었지만 나는 『좋은 일이니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해 보겠다』고 말했다.
정동석씨 집에서 교수 교섭을 받은 지 얼마후에 또 한번 이사를 가야했다.
계동 대동상업 운동장 밑에 있던 조반석씨 집 사랑채에 셋방살이를 들어갔다.
이 집서도 기거가 안정되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수화 (김환기)가 성북동에 2층 양옥을 한채 사두었으니 집도 지킬 겸 거기서 살라고 했다.
성북동 수화집으로 이사해서 얼마 되지 많아 그만 그 집이 팔려 버렸다.
또 어디로 이사를 가야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집을 사온 사람이 나도 잘 아는 언론인 성재 이관구씨여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성재는 『식구도 적으니 내가 아래층에 살고 월전이 2층에 살면 될게 아니냐』고 제안했다. 나는 성재 댁에서 혜화동 195번지 미술대학 관사로 옮겨갈 때까지 신세를 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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