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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름 바꾸기 소동 '긁어 부스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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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사람이 매일 쓰는 언어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포퓰리즘에 가장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명실상부(名實相符)'란 말은 원래 동서고금을 통해 어떤 사물과 현상 속의 메시지를 겉으로 나타내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보편적 덕목이다. 동시에 어떤 본질의 실체를 밝히는 평가 기준으로 여겨져 왔다.

최근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의 느닷없는 '표준색 이름 개정안'은 이 같은 명실상부의 바람직한 방향에서 크게 벗어났다. 겉과 속이 다른 이른바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색 이름 '새로 짓기'나 '새로 바꾸기'가 시각언어를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붙였다는 과거 이름은 없애고, 먹는 과일 이름들을 대거 새로 등장시킨 것을 보면 요즈음 몇 년 사이 부쩍 기승을 부리는 일제잔재 청산 바람과도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선 애써 외면.축소하면서도 저 먼 나라 이라크 전쟁 난민의 인권과 국내 초등학생의 일기 쓰기 감독, 중.고생의 두발 단 속까지도 자상한(?) 인권문제를 제기했던 국가인권위원회가 또 이번엔 "특정 색을 살색으로 명명한 것은 평등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그동안 '연주황'이나 '연한노랑분홍' 등으로 써 왔다는 '살색'을 '살구색'으로 대체키로 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인권위의 문화예술적 깊디깊은 조예와 넓디넓은 인권의 범위에 한번 놀라고, 기술표준원의 이례적인 초스피드 행정에 또 한번 혀를 내두를 수밖엔 없다.

당국은 이번 개정안이 일반에게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표현 방식에 따라 한 가지 색을 두 가지 이름으로 혼용해 부를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당초 발표 분위기에서 한참 물러선 느낌이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한 가지 색을 두 가지 이름으로 혼용'한다는 대목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한 색 두 이름', 즉 일색이명(一色二名)이라는 아리송한 개념으로,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홍길동이란 이름을 '홍복동'이라고 섞어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은 논리를 넘어 애초부터 궤변으로 봐야 할 것이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병아리색이나 수박색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표준말로 인정되는 것일 뿐"이라는 당국의 초라한 해명에 이르러선 말문이 막힌다. 표준말이란 같은 사물을 놓고 하나의 명칭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 이상 복수의 표준말이란 것은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색 이름에는 빨강.파랑.노랑 등 '계통색'이름과 수박색.병아리색 등 동식물의 이름을 빌려 연상색을 표현한다는 '관용색' 이름의 두 종류가 있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왜냐하면 색은 색일 뿐 모든 색은 각각이 그 나름의 이름을 갖고 있으며, 그 이름이라는 것은 과거 오랜 관습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노랑은 계통색이고 병아리색은 관용색이라는데 도대체 '계통'은 무엇이고 '관용'은 무엇인지 헷갈릴 뿐이다. "시각언어나 문자언어나 인간 본연에 잠재해 있는 의식의 흐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게오르그 케페스의 지론을 되새긴다면 색채 이름 개명 소동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아울러 특정 색을 살색으로 명명한 것이 평등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데 인종차별 의식을 극복하려는 발상은 환영할 일이지만, 어느 지역이건 국가건 지구촌에서 잡다한 인종의 피부색을 하나로 묶어 살구색으로 통일하려는 것도 모순이다. 더구나 특정 대상의 색 이름은 표준어를 여럿으로 섞어 쓰자면서 살색을 살구색으로 대체하려는 발상은 앞뒤가 맞지 않는 뒤죽박죽 개념이다.

일상생활 주변에는 언어관습을 비롯해 시급히 개정해야 할 부분이 숱할 것이다. 무엇을 바꾸려고 할 때는 그 결과가 개선이 될지 개악이 될지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이 일머리의 순서다. 멀쩡히 잘 써오던 색채 이름을 작명이나 개명하는 것은 특히 개념확립 과정에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예기치 못한 인식 대란을 불러 엄청난 해악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유한태 숙명여대 디자인학부 교수·형태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