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전야’부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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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현(1955∼ ), ‘전야’부분

십일 월은 덫에 걸리고 우리의 강은
어둡고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겨울 강가에 누군가 모닥불을 태우며
꽁꽁 언 강심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의 한가운데 타오르는 불꽃처럼
우리의 조국에도 봄은 오고 꽃도 필 테지만
우리는 간다 추운 겨울의 밤 가운데로
바닥만 뜨거운 값싼 여인숙 이 층
등사기와 담배 꽁초와 소주잔 틈에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잠들어 있다.
멱살 움켜잡던 시퍼런 분노도
소주잔에 스러지던 서러운 눈물도
개나리 고개 달밤도 지나고
우리는 간다, 가슴 깊이 출정가를 부르며
돌아오지 않으리 결코
봄과 함께 아니라면 결코
사랑하는 여자여, 기다리지 말라.
돌아오지 않으리
결코 결코……


출정가를 부르며 전선으로 떠나는 시적 주체들의 비장한 결의를 오늘의 젊은 세대는 제대로 실감하기 힘들 것이다. 봄과 함께가 아니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시적 표현은 자신들의 생을 시대의 변혁에 바치겠다는 다짐이요, 각오 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요만큼의 숨통과 자유와 실존의 영토는 그들이 치루어 낸 자기 시대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아니었다면 미래의 시간으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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