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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던진 돌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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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학교 때이던가, 빙판길에 심하게 미끄러진 선배 옆에서 친구와 함께 낄낄거리다가 그 선배에게 엄청나게 아픈 꿀밤을 몇 대씩 쥐어박힌 적이 있다.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는 너무 억울해 했다. 우린 그 선배가 넘어지는 장면을 보지도 못했고, 우리가 낄낄거린 것은 그 전날 TV에서 본 코미디 얘기를 하다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토벤 소나타를 아주 잘 연주한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이 와서 들었으면 울고 가겠더라"고 말하면 최상의 찬사가 된다. "내 작품이 이렇게 멋있게 연주될 수도 있구나 하고 베토벤이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토벤 연주를 완전히 망쳐버린 연주자에게 칭찬해 준답시고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내 작품이 이렇게 처참하게 파괴될 수도 있구나 하고 서럽게 울고 갔다"는 의미로 생각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말을 해 준 동료가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질 것이다. 같은 칭찬이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듣는 이에게 기쁨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 1일 피아노계의 살아 있는 전설 레온 플라이셔의 독주회가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그의 독주회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예술의전당 기획팀은 상투적인 약력 소개나 곡목 해설 외에 플라이셔의 인간적인 면모도 소개하면 더욱 좋겠다 싶어 왕성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견 피아니스트 A씨에게 글을 부탁했다. 플라이셔가 가르치던 피바디 음대에서 공부했고, 그의 마스터 클래스를 2년간 매주 참관하면서 플라이셔를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존경했으며, 그와 개인적인 친분도 두터운 A씨는 우리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며칠 뒤 '내가 아는 레온 플라이셔'라는 제목의 멋진 원고를 보내줬다. 그러나 프로그램 최종 교정 때 한 직원이 A씨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가 아는 레온 플라이셔'보다는 '나의 스승 레온 플라이셔'가 훨씬 친밀감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제목을 바꿨고, 그것이 그대로 인쇄돼 수많은 청중에게 배포된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1 대 1의 장인정신에 입각한 것으로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우는 제자의 자부심은 대(代)를 이어 계승되고, 또한 뛰어난 제자를 키워낸 스승의 자부심도 대단하다는 예술계의 일반적 진리를 간과했던 것이다. 피바디 음대에서 다른 훌륭한 교수의 문하에 있으면서 플라이셔의 마스터 클래스 수업을 매주 감탄하며 듣던 수십 명의 학생 중 하나일 뿐이었던 A씨는 '나의 스승 ○○○'라는 제목 때문에 졸지에 플라이셔의 제자이기를 자칭하고, 그 위대한 이름 밑에서 입지를 높이려는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뻔뻔스러운 사람이 돼버린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A씨에게 헌신적으로 좋은 가르침을 준 피바디 음대 스승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제자로 만들어 버렸다. 어떤 사람이 무심코 행한 실수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심각한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인가!

어쩌다 한번 연주를 망친 연주가가 명예를 회복하려면 200% 실력을 보여주는 기막힌 연주를 열번 연속해서 해야만 된다는 게 연주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연주를 본 청중이 다시는 그의 연주회에 오지 않을 것이기에 사실 명예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깨어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의도적이건, 오해에 의한 것이건 간에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인간관계를 원상태로 복원시키려면 엄청나게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곤 한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이 남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냇가에서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