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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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음도가 적어도 몇 데시벨쯤은 낮아진 것 같았다.
5일 밤 11시50분의 광화문 네거리.
적지 않은 차량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으나 전 같으면 통금시간에 쫓기는 차량들이 바람을 가르며 질주할 시간이었는데도『끼-익』급브레이크를 밟는 금속성의 소름끼치는 소리는커녕 『빵빵 뿡뿡』거리는 클랙슨 소리조차 없었다.
그저 신호에 따라 차량들이 느긋하게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잔뜩 긴장한 채 길목을 지키는 경찰관이 다소 맥빠진 표정을 짓는다.
『이 정도면 자장가 소리죠.』
그동안 길옆에 자리잡은 죄(?)로 소음에 한껏 시달려 온 광화문파출소의 순경들은 입을 모았다.
눈을 돌려보면 무교동 쪽.
택시가 다가올 때마다『불광도 옹(불광동)!』『시인초 온(신촌)!』하며 애걸을 하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금을 두 배 내겠다고 두 손가락을 펴 보이던 사람도, 초침에 쫓기며 『영동 5천 원!』을 절규하던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자정이 다 됐는데도 눈에 뜨이는 빈차들. 느긋해진 것이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6일 0시10분, 명동.
더러 비틀걸음에 외마디 소리를 질러 대는 사람도 없진 않았으나 이 골목 저 골목의 2천여 인파(경찰추산) 는 대부분 산책이라도 나온 걸음걸이였다.
한 회사원은『초저녁에는 집에 있다가 11시쯤 구경을 나왔다』고 했다.
「쫓기며 살아온」통금시대 사람들이 통금 없는 거리로 견학을 나온 것이다. 상오1시가 넘자 그 견학인파도 통틀어 2백 명쯤으로 줄어 버렸다.
상오1시30분, 삼일빌딩 앞 횡단보도.
대학생 차림의 젊은이가 푸른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너가려고 달려오다가 깜빡깜빡하며 신호가 바뀌자 가로질러 달리는 자동차가 한대도 없는데도 홀로 신호기 밑에서 발을 멈추고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생맥주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쫓긴다』는 구실로 틈만 있으면『나 하나쯤이야…』하며 살아온 통금시대의 사람은 이미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자기 마음속에 뿌리 박힌 통금까지 풀어 버린 자유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국민의식 수준이 지금까지 예상했던 우려가 얼마나 기우였던가를 입증할 만큼 성숙돼 있음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고 「마음속의 통금」도 풀고 살아야 할 때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 되자는 것이다. <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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