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진보 없는 화장품 매년 내놓는 건 가격 인상 꼼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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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클라란스’의 크리스티앙 쿠르탱클라랑 회장이 최근 서울을 찾았다. 서울 삼성동 파크 하얏트에서 만난 그는 “선친이 ‘식물의 힘’을 잘 알았던 분이라 클라란스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오른쪽 위 제품은 식물성분 베스트셀러 ‘더블세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클라란스(Clarins)’ 회장 크리스티앙 쿠르탱클라랑(59·Christian Courtin-Clarins·이하 CCC)은 “해마다 ‘뉴(new)’라고 이름 붙인 화장품이 나오는데 진짜 새로운 화장품은 드물다”고 했다. “클라란스도 증시에 상장돼 있을 때는 매년 ‘새롭다’고 할만한 기술적 진보가 없는데도 신제품을 출시해야 했다”는 고백도 덧붙였다. 1954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클라란스는 올해 창업 60주년을 맞았다.

 클라란스는 CCC의 부친이 시작한 브랜드다. 부친은 치료용 마사지사 ‘카이로프랙터’였다. 마사지용 침상 하나, 직접 개발한 마사지 오일로 화장품 기업의 초석을 닦았다. 클라란스는 현재 150여 개 국 1만300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84년 프랑스 증시에 상장했다가 2008년 36억 달러(약 3조3800억원) 규모의 주식을 사들여 증시에서 철수했다. 최근 한국을 찾은 CCC 회장을 만났다.

 -어떤 맥락에서 내린 결정인가.

 “상장 초기였던 80년대는 금융이 기업 경영에 기여했던 시기다. 한데 2000년부터 금융 시장이 단기화했다. 3개월 마다 증시의 평가를 받아야 했다. 마라톤 선수의 기록을 100m 단위로 끊어서 기록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단기적인 목표로 회사를 운영하는 게 클라란스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래 가지곤 우리가 추구하는 품질을 유지하고 협력업체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겠다 생각해 결정했다.”

 -상장 폐지 후 어려움은 없었나.

 “큰 고비는 없었다. 돈을 주고 (경영상) 자유를 샀다.”

 -화장품 산업은 10여 개 브랜드를 거느린 로레알·에스티로더 그룹처럼 대형화돼 있다. 이들과 경쟁하려면 유한회사 체제로는 버거울 텐데.

 “신제품 개발 등을 위해선 현재 수익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상장 폐지 후 장기적인 관점에서 제품 연구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상장 기업일 땐 (단기 성과를 원하는 금융권의 요구 탓에) 진짜 신기술이 적용됐다고 할 수 없는 제품을 매년 새로 내놨다. 마케팅 관점에서만 ‘뉴’라면 이건 가격을 올리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우린 화장품 업계의 ‘포르셰’다. 탄탄한 기본기에 새 기술을 더하지만 그럴 때마다 ‘뉴’라고 광고하지 않는 게 포르셰와 클라란스다.”

 -포르셰도 자체 생존하지 못하고 폴크스바겐 그룹에 인수됐다.

 “클라란스는 다른 회사보다 더 오래 연구해 신제품 출시가 늦을 순 있어도 시장에서 뒤처진 적은 없다. 마케팅으로 ‘가짜 신제품’을 개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CCC 회장은 포브스가 꼽은 ‘2013 세계 억만장자 1000명’ 중 670위에 올라 있다. 추정 자산은 20억 달러(약 2조 1250억원). 프랑스 경제계에선 클라란스 패밀리의 현금동원 능력이 ‘프랑스 5위권’이라고 짐작한다. 비상장사인 클라란스 그룹의 연매출은 약 20억 유로(약 2조 7000억원)로 추정된다.

 -경영 원칙은.

 “‘잘하자, 더 잘하자, 즐겁게 일하자’다.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 잘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더 잘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경영 철학이자 인생 철학이다.”

 -최근 한국 화장품 브랜드의 성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 한국 화장품 기업은 스킨케어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 클라란스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흥미로운 제품을 많이 개발한다. 특히 보습 화장품에 강점이 있다. 한국 브랜드의 선전은 나를 더욱 채찍질하는 자극제다.”

글=강승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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