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4)제76화 화맥인맥(23)|월전 장우성|「청춘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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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선전에서 두 번째 특선한『청춘일기』를 그릴 때였으니까 41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현초(이유태)와 함께 명륜동 일인 자매 집 2층을 빌어 쓰다가 혜화동으로 이사했다.
혜화동 성당 앞 고갯길을 오르면 마루턱에 동 소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때만 해도 동소문 일대는 모두 앵두 밭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는 한참 2층집을 짓기 시작했다.
넓은 장소를 구해서 혜화동 2층집으로 옮겼다. 20평 남짓한 방이어서 현초와 나, 둘이 화실로 쓰기에는 넉넉했다. 같이 있던 운당(조용승)은 제기동 고대 앞에 있던 자기 집으로 들어간 후여서 명륜동에 셋이 있을 때보다는 사뭇 넓었다.
그때 마침 현초가 일본 가고 없어서 아랫목도 내차지, 웃목도 내 차지였다.
난로도 놓지 않았는데 첫추위가 몰아닥쳤다. 매트리스도 없는 마루방인데도 침대를 놓질 않고 맨바닥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잤다.
작품도 여기서하고 추운 데서 그냥 잔 탓인지 담이 붙었다.
괜찮겠거니 하고 며칠 지냈더니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만큼 심해 병원엘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리는 어깨에다 주사1대를 맞았다. 그만하면 낫겠지 하고 하룻밤을 잤더니 병세는 더 악화돼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어졌다. 이 우환 중에도 뜨거운 곳에 환부를 대면 즘 시원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교 끓일 때 쓰는 알콜 램프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 불 위에 벼룻돌을 대서 달구어 가지고 어깨에 댔더니 좀 시원했다.
밤새 이것을 하고 있었는데도 효험이 없었다.
피가 엉겨붙었는지 벼룻돌 치료는 그야말로「언 발에 오줌누기」였다.
그때 마침 도 동에서 약 종상을 하던 숙부가 내게 볼일이 있어 왔다가 이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엉금엉금 기어서 화장실로 소변보러 갔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숙부가 있었기 망정이지 큰 일 날 뻔 알았다. 이 사실을 숙부가 돈암동 종점에 사는 둘째 자씨에게 알려줘 누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누님은 내 꼴을 보고는 자지러지다시피 했다. 당장 차를 불러 누님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한옥 온돌방에 뜨끈뜨끈하게 불을 지피고 나를 뉘었다
추운 데서 거처하다 갑자기 뜨거운 곳에 와서인지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병세는 더욱 악화, 일어나고 눕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시중을 들어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누님 집엔 경성 여 의전에 다니는 학생이 기숙하고 있었는데 그가 주인동생이 아프다니까 문병 차 들어와 봤다. 여 의전학생은 「사루소브로카농」이란 정맥주사약을 구 해다 나에게 놓아줬다.
한밤중이었는데 주사바늘을 빼자마자 온몸에 경련이 얼어 났다. 그 경황 중에 봐도 여학생의 얼굴은 겁에 질려 백지장 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고, 누님은 어쩔 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닫고 야단이었다.
떤다고 이불을 세 채나 덮었는데도 그게 들썩들썩할 정도였다.
아우가 하도 급하니까 자정이 넘었는데도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서 의사 한 분을 데리고 왔다.
의사는 아우가 하도 볶아치니까 마지못해 따라오기는 따라오면서도 연신『가보나마나 운이 없으면 죽었을 게고, 지금은 운이 좋아 들렸으면 살아날 것』이라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더라는 것이다.
명이 길었든지 한바탕 야단을 벌인 뒤에 좀 정신이 들었다.
날이 밝자 어디서 이 소식을 들었는지 내가 호랑이를 그려 준 일이 있는 둘도 없는 친구 이종재씨가 찾아와 자동차에 태워 가지고 기독교 태화 관 앞에 있던 김사일 내과에 입원시켰다
김사일 원장은 이종재씨와 가까이 지내는 터여서 내게도 극진한 성의를 보였다.
건성늑막염으로 한달 남짓 이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사선을 넘나든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원장은 내가 아픈 걸 꾹 참고 표시하질 않았더니 친구에게『저 사람 참 지독한 사람』 이라고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청춘에 혼자 되어 친정서 살다 친정서 돌아가신 나의 맏누이 (장아지)가 붙어 앉아 간호해 줬다.
의사·간호원·누님의 정성으로 왼쪽겨드랑이에 불룩 내밀었던 돌기도 차차 줄어들고, 사람 팔에 매달려 어슬렁어슬렁 걷던 것도 차차 회복이 돼 한 달을 넘기고 퇴원했다.
나는 이 병원에서 일생을 통해 가장 고통스런 병역을 치렀지만, 또한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기도 했다.
한가지 아쉬운 일은 내 병을 낫게 길을 열어 준 친구 이종재씨 일가가 6·25사변 중 이천서 폭격을 맞아 이제 라도 마주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된 점이 못내 서운하기만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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