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라운지] 의약분업 이후 설 땅 잃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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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남성 발기부전 환자 100명이 '가짜' 비아그라를 복용한다고 가정하면 이 중 몇 명이나 진짜 발기에 성공할까. 30명가량은 발기한다는 게 비뇨기과 전문의들의 말이다. '플라시보'라 불리는 가짜약 효과 때문이다.

여기서 '가짜'는 불법제조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임상시험용임을 뜻한다. 진짜 비아그라와 외양은 식별할 수 없지만 실제 치료 성분은 빠져 있다. 결국 이 약을 먹고 발기에 성공한 환자는 약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효과를 본 것이다. 의학의 역사는 플라시보의 역사라고 할 만큼 기원이 오래됐다. 환자에게 사용한 가짜 약의 종류도 악어의 배설물.당나귀 발톱.미라 분말.개구리 정액.사람의 땀, 심지어 돌멩이.모피.깃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가짜 약 효과는 흔히 엄마의 약손에 비유된다. 복통이 심할 때 엄마나 할머니가 배를 만져 주면 통증이 가라앉는 원리를 의사가 치료에 활용하는 것이다.

병원에선 주로 내과.소아과.정신과.치과.마취과 의사가 환자의 통증을 덜어 주기 위해 가짜 약을 적극 활용한다. 의사가 "이것은 강력한 진통제다. 이것을 맞으면 곧 나아질 거다"라고 '주문'을 거는 것이다. 효과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믿음이 클수록 크다.

많은 의사들은 "환자가 병원에 가면 링거주사부터 놓는 것도 이런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데 동의한다. 링거주사를 맞기 위해 팔을 내놓으면서 환자는 "지금부터 의사가 내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가짜 약은 해당 약의 재고가 없을 경우 의사에게 훌륭한 대체제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의료 비사(秘史)에 의하면 불면증 환자에게 수면제 대신 소화제를 처방하고 고열 환자에게 해열제 대신 증류수를 주사하고도 '용한 의사'란 말을 들은 명의들도 있었다.

그러나 의약분업 이후 의사의 처방전이 환자에게 공개되면서 가짜 약 처방이 힘들어졌다.

환자에게 가짜 약을 처방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라는 지적도 거세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통증을 줄여 주고 마음을 달래 주는 가짜 약은 점차 병원 현장에서 사라지고 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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