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보고 용의자 지목해도 무조건 증거되지는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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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범죄 피해자가 용의자들 사진으로 범인을 지목해내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다면 해당 피해자의 진술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박모(25)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6일 밝혔다. 박씨는 2003년 6월 경기도 포천에서 발생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과 관련, 피해자가 진술한 범인의 외모.이름 등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 기소된 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는 범인이 짧은 머리 스타일이라고 진술했는데 경찰이 피해자에게 보여준 용의자 5명의 사진 가운데 박씨만 짧은 머리였다"며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놓고 범인을 지목하게 해야 하는 범인식별 절차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어 "경찰이 제시한 사진에 표시된 박씨의 이름과 피해자가 들었다는 범인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피해자는 무의식적으로 박씨가 범인이라는 암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며 "피해자가 어두운 밤에 모자를 쓴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고 밝혔다.

김종문 기자

[뉴스 분석] 지목 과정 공정해야

수사기관이 다수의 용의자를 세워 놓거나(라인업), 용의자 사진을 제시하고(사진 배열) 피해자나 목격자에게 범인을 지목하도록 할 때는 엄격한 절차와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대법원은 그동안 판결을 통해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대면시키고▶용의자와 피해자 등이 미리 접촉해서는 안 되며▶사후 평가를 위해 대질과정과 결과를 문서와 사진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점 등을 분명히 요구해 왔다. 특히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사진 한 장으로 목격자가 범인임을 확신하는 진술을 하더라도 다른 증거나 물증이 없이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른 곳에서 본 사람인데도 낯익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데다 사람의 망각곡선은 L자형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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