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20 결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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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유랑극단에선 이런저런 해프닝이 많았다. 옥이와 나의 '성추행 해프닝'도 그중 하나였다. 사진은 40대 초반의 필자.

저녁이 됐다. 범인 색출 작업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단원들은 극장으로 갔다. 막을 올리기 전에 총연습이 있었다. 그런데 키 작은 뱃사람 역을 맡은 연구생이 안 보였다. "여관에서 자고 있는 것 아니야? 어서 가봐." 여관에도 그는 없었다. 저녁 공연을 시작할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 더 찾아봐." 단장의 말에 연구생들이 숙소로 갔다. "단장님, 그 친구 짐까지 몽땅 없어졌는데요." 사라진 연구생은 네 명의 용의자 중 하나였다.

나는 그제야 누명을 벗었다. 분한 마음은 그래도 남았다. 공연이 끝나고 터덜터덜 여관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뒤를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옥이였다. "사과하려고요. 극장 앞에서 아까부터 기다렸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원들이 나를 범인으로 몰아 세울 때 그는 침묵만 지켰다. "삼룡이는 아냐"라고 한 마디만 해줬어도 그렇게 모진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나는 그냥 걸었다. 여관 대문에 이를 때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급기야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삼룡씨, 화 푸세요. 정말 미안해요. 안 그러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다 씩 웃고 말았다.

그때부터 옥이와 나는 친남매처럼 가까워졌다. 먹을 것이 생기면 몰래 숨겨 두었다가 살짝 건네곤 했다. 내가 세수하러 갈 땐 그가 먼저 와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줬다. 그렇게 정이 들었다. 단원들이 "저것들이 무슨 일을 치르긴 치른 모양이야"라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아세아 악극단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다. 마지막 공연지인 경남 마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극장 사정으로 공연을 하루 쉬게 됐다. 옥이와 나는 바다를 보러 나갔다. 갈매기 울음과 백사장, 간만에 유쾌한 시간이었다.

여관으로 돌아왔다. 다들 외출하고 없었다. 둘만의 시간이었다. 우린 마루에 누웠다. 옥이가 입을 뗐다. "전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요." 그리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약혼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동네 사람이 주선한 혼담을 할머니가 받아들였다고 했다. "약혼자는 국방경비대 헌병 상사예요. 우린 연애할 운명이 아닌가 봐요."

묘한 기분이었다. 내 가슴엔 여전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김화자로 인한 상처였다. 옥이에 대한 감정은 애매했다. 우정이라고 하기엔 애틋했고, 애정이라고 하기엔 좀 담담했다. 그 중간쯤이 아니었을까.

굳이 옥이 얘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그는 참담한 모습으로 나와 다시 만나게 된다.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전선을 누비며 진짜 오누이처럼 각별한 우애를 나누었다.

마산 공연을 마치고 우리는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 시계탑 아래서 나는 옥이와 헤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극단을 물색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불과 1년 전이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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