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마음의 벽」헐고 오순도순 범죄없는 마을 안성군 고삼면 쌍지리 산문부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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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배를 깔고 앉아 여물을 씹는소의 눈망울이 평온함을 더해준다.
마당 가득히 펼쳐진 멍석 위에 깔린 나락이 풍요롭다.
「범죄없는 마을」의 겨울 바람은 포근하기만하다.
경기도 안성군고삼면쌍지리 산문부락-.
21가구 1백3명의 이마을은 올해 3년만의 대풍으로 기쁨에 들떴는데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영광까지 안게되어 마치 축제기분이다.
지난달 12일 수원지검이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한 이후 주민들의 긍지는 더욱높아졌다.
「범죄없는 마을」이란 1년동안 범죄가 전혀 없었던 마을로 전국 각 지검별로 심사, 선정하고있다.
마을 주민중 단 1명이라도 기소되거나 기소유예·공소보류·기소중지·소년부송치 처분을 받은 일이 없어야한다.
즉 어떠한 종류의 형사사건이 단 1건이라도 있어서는 아니된다.
산문부락은 이러한 심사기준을 거뜬히 통과했다.
더구나 14세이상 주민 83명가운데 지난 73년이후 지금까지 8년동안 1명도 수사기관에 입건된 일이 없어 수원지검 관내에서 선정된 12개마을중가장 우수한 범죄없는 마을이 됐다.
『컴퓨터 조회결과를 보고 모두 놀랐습니다. 전국 각지검별로 범죄없는 마을을 선정하고 있으나 이마을처럼 깨끗한 마을은 찾기 힘들것입니다.』
수원지검 송주환검사는 컴퓨터마저 믿을수 없어 범죄인 기록부를 모두 확인했다고 말했다.
산문부락은 안성읍에서 북쪽으로 15㎞거리.
해발 8백m의 쌍룡산을 뒤로 두고 앞에는 논·밭을 부채살처럼 펴 놓았다.
논 4만7천평, 밭1만2천평과 소30마리가 이 마을의 전재산.
별다른 특산물도 없이 이같은 농사만으로 연평균 가구당 3백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3백여년건 마을이 생긴뒤로 해주최씨가 9가구, 간택림씨가4가구로 대성(?)을 이룬 것 외에는 여러 성씨가 오순도순 모여살아왔다.
그러나 이마을에서는 일가진척이 따로 없다.
성씨를 따지지 않고 제일 나이가 많은 주민을 이마을의 가장 큰 어른으로 모시고있다.
최고령자인 최상동옹(77)과 신정남할머니(83)는 모든 주민의 할아버지이고 할머니.
설날이면 최·신씨의 집에 온마을 주민들이 몰려 세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 마을의 큰 잔치나 행사가 있을때는 자문역을 맡고있다.
농번기에는 『네논 내논』 가리지않고 서로 도와가며 모내기는 윗논부터, 벼베기는 벼가 영근 논부터 함께 베어낸다.
결혼·장례등 길·흉사 때는 온 주민이 함께 돕고 생일잔치 때는 이웃 주민을 불러 아침식사를 나누는 것이 마을의 관습이다.
따라서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으며 주민들끼리 「마을의 벽」을 헐어버린지 오래됐다.
국민학교 운동회가 열리는날은 이마을의 축제.
이 마을의 국민학생은 9명밖에 되지않지만 취학 어린이가 있거나 없거나 모두 음식을 장만해가 마을 어린이를 응원해준다.
『부모·형제가 따로 없어요. 모두가 한가족인걸요.』
11년전 인천교육대학을 졸업, 이웃 고속국민학교에 첫 부임해온 김철수교사(36)는 마을인심에 반해 도시전출을 사양하고 아예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이마을에서 유일한 김씨의 컬러TV가 있는 안방은 중요프로가 있는 날은 마을 주민들의 극장(?)으로 변해 버린다.
이 마을에서 3㎞떨어진 안성경찰서 고삼지서 경찰관 4명은 주민들의 민원서류 전달을 위해 간혹 이 마을에 들름뿐 「방범순찰」이나 「범죄 수사」를 위해 와일본은 한번도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몰멤이가 없는것이 특징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마을주민들의 성격도 모나지 않고 유순하기만 하답니다.』 이장 박장수씨(46)는 서울등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강력사건의 뉴스를 들을때마다 마을주민들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5년전부터 마을부녀회(회장정청자·심)에서 생필품을 공동구입, 나누어쓰고 4H구락부에서 마을앞 빈터에 콩을심어매년 25만원의 수확을 올려 마을공동기금으로 쓰고있으나 지금까지 만10원이나마 계산이 틀려본 일이 없었다.
이같은 범죄는 마을에도 남모르는 고민거리가 있다.
주민들의 도시전출로 노동력이 크게 달리는 것.
10년전까지만해도 31가구였으나 이제 가구로 10가구나 줄었다. 그나마 농사를 지을 수있는 20∼50대는 온마을을 통틀어 33명뿐.
겨울한철을 빼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아침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논·밭에나가 일을해야할 정도로 바쁘다.
안성읍에서는 장딴지가 굵고 얼굴이 검게 탄 사람더러 산문사람이냐고 할 정도로 이마을의 근면성은 널리 알려져있다.
이같이 일에 밀리기 때문에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밤 9시쯤이면 대부분 잠자리에 들어온 마을이 조용해진다.
『할일 없이 모여 앉아 괜한일을 가지고 「내가 옳다, 네가그르다」고 따지는 마을에서나 사건이 있고 다툼이 있지 우리 같이 할일이 많은 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고 이장박씨는 말했다. <추일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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