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대 총리들 "외교 벼랑 끝" 공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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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일본의 전직 총리 8명이 일제히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먼저 고이즈미 총리가 원래 속했던 파벌의 수장이자 현재 일 정치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가 가세한 점이 주목된다. 모리는 이제까지 야스쿠니 참배 문제에 관한 한 언급을 자제하는 등 외교 문제에 있어선 보수적 입장을 취해 왔다. 그의 이날 입장 표명은 그동안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관대했던 일 정치권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또 민주당 소속의 하타 쓰토무(羽田孜) 전 총리의 경우 일본 초당파 의원 모임인 '모두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이다. '개인 자격'의 야스쿠니 참배는 찬성하지만 '총리'의 참배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밝힌 셈이다.

이처럼 성향이나 소속 정당이 다르면서도 전직 총리들이 한목소리를 낸 것은 그만큼 현재 일본의 대아시아 외교가 벼랑에 서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다. 지난달 말 중국의 우이(吳儀) 부총리가 고이즈미 총리와의 면담약속을 전격 취소하고 귀국한 뒤 일 여론이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에 가지 않는 게 좋다"는 쪽으로 기운 것도계기가 됐다.

아사히(朝日)신문이 지난달 31일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참배에 반대하는 응답자는 49%로, 참배를 찬성하는 39%를 크게 웃돌았다. 게다가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니혼게이단렌(日本經團連) 회장 등 경제계도 그동안의 침묵에서 벗어나 "개인의 신념은 이해하지만 그보다는 총리의 입장에서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며 고이즈미 총리 압박에 나섰다.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고이즈미 총리가 이 같은 전직 총리들의 건의를 과연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총리의 한 측근 인사는 "고이즈미 총리가 코너에 몰리기는 했지만 쉽게 참배를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성격상 주변의 압력에 굴하는 형태로 참배를 그만둘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스쿠니 참배 문제'를 일본이 현재 추진 중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카드'의 하나로 활용하는 방안은 측근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A급 전범을 야스쿠니에서 분사하게 되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사 방안을 전문가 집단에서 논의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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