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명의'로 수십억 챙긴 일당 검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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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노숙인을 회사 근로자로 둔갑시키고 그 명의로 전세자금 수십억원을 빼돌린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주범 김모(33)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명의를 빌려준 노숙인 전모(49)씨 등 20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2일 밝혔다. 김씨 등은 2011년 1월부터 지난 4월까지 모두 207차례에 걸쳐 노숙자들 명의로 근로자ㆍ서민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33억7800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김씨 일당은 근로자 등록으로 노숙자들의 신용등급이 상향된 것을 이용해 제2금융권 등에서 대출을 받아 고가의 승용차를 구입한 뒤 되파는 수법으로 41억 5900만원을 추가로 챙기기도 했다.

김씨 일당은 대출 조건 충족을 위해 위장 근로사업장 18개를 설립한 뒤 노숙자들을 근로자로 허위 등재하고 4대보험에 가입시켜 이들을 서류상 근로자로 둔갑시키는 등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러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정부가 지급하는 근로자ㆍ서민주택전세자금이 실제로 거주하는 지와 상관없이 명의자와 세입자로 등록만 하면 돈을 타낼 수 있는 제도라는 점을 악용해 전세자금을 가로챈 것이다.

김씨는 전세를 끼고 저렴하게 매물로 나온 주택을 2000만~3000만원에 산 뒤 노숙인 2명을 각각 주택 명의자와 세입자로 등록했다. 이후 명의자 앞으로 국고보조금이 나오면 갚지 않고 잠적하는 식으로 돈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해당 아파트에 실제로 거주중이던 일부 세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집이 경매에 넘겨지거나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등 피해를 보기도 했다. 김씨 일당은 노숙인들과 3~6개월간 합숙하며 금융 기관의 대출 심사에 대응하는 법을 가르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노숙인들은 명의를 빌려준 뒤 김씨로부터 200만원에서 1000만원 상당의 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전세자금 대출 시 국토교통부, 기금 취급은행 등에서 관련 서류와 사실 관계를 면밀히 확인해야 이같은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대출 명의를 알선한 노숙인 모집책, 합숙 교육 담당 등 공범 40여명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고석승 기자 go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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