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재 <1>|눈끄는 고분벽화·다양한 선사유물|남북교환전 제의 계기|살펴본 북한의 문화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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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최근 한국정부가 제의한 남북한고대사 자료교환전은 북한문화재에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학계의 갈망을 크게 고무시켜주었다. 우선 간접 확인된 해방이후의 북한 문화재발굴현황과 한국에 없는 고구려 고분벽화들의 실태, 선사유물등을 알아보고 벽화·토기·금속공예등 분야별로 나누어 북한의 고대사자료를 연재하기로 한다.
남북한문화재의 비교는 한마디로 한국이 도자기·회화·불상등에서는 질·양면으로 단연 우세하고 북한은 고분벽화·토기·인골등의 선사유적이 특기할만하다.
8·l5해방이후의 고고발굴은 신라·백제고분등을 중심으로한 한국의 역사시대 유적발굴조사에 비해 북한측은 석기시대등의 선사유적 발굴조사를 폭넓게 전개한점이 각각 특징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선사유물, 고려왕릉등이 손꼽히는 북한의 문화재는 5천년 한국사의 전체적규모에서 보면 일부의 「편린」에 불과한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문화재관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남북한합동의 「한국미술5천년전」을 구성할 경우 북한측의 문화재는 전체 출품유물의 3분의1을 차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문화 유적중의 압권으로 알려진 고구려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51기가 발굴 조사됐고 그중 절반이 넘는 30기정도가 해방이후 발굴됐다.
가장 최근의 발굴로 이목을 끈 고구려 고분은 77년 발굴 조사된 평양 덕흥리 벽화고분.
고구려 미천왕릉으로 추정하는 49년 발굴의 황해도안악3호분(일명 동수묘)과함께 2대유명벽화고분인 덕흥리고분의 주인공은 중국 북경지방의 고구려 지방장관을 역임했다는 유주책사 진이다.
진의 초상화를 비롯한 관할 13개주의 군수들이 주인공을 배알(배알)하는 의식도·수렵도·천녀도등이 벽화의 주요 내용들이다.
이고분에서는 서기408년의 명문이 출토돼 고구려 영토가 한때 중국 북경까지 뻗쳤다는 설이 확인되고 그 시기가 정확히 밝혀지기도 했다.
안악3호고분은 왕의 행렬도등 대작의 벽화들을 간직한 벽화고분의 절정으로 평가돼오고있다. 이고분도 역시 서기357년의 명문이 발굴돼 조성시기를 명확히 밝혀줬다.
이들 2개 고분출토명문은 지금까지 벽화고분의 생성기를 5세기이후로 보아온 학계에 4세기 중엽까지 연대가 올라간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 중요 자료가됐다.
이밖에 해방이후 중요 고분발굴로는 압록강연안 심귀리·독노리등의 적석총발굴을 손꼽을수 있다. 이들 적석무덤발굴은 고구려 적석총의 발달사를 밝혀낸 결정적인 자료가 됐던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이같은 적석총발굴은 한국의 서울 암사동, 춘천 중도등 한강유역에서 발굴된 고구려 적석무덤의 연대를 밝히는데 도움이된 간접자료가 되기도했다.
김원용박사(서울대·고고학)는 3국중 고구려만이 유독 찬란한 벽화문화를 갖게된 이유로 중국의 벽화를 먼저 받아들여 재빨리 토착화시킨점을 들었다.
신라·백제등에도 고구려 벽화가 전파됐으나 이들 두나라는 전통적인 보수성때문에 크게 유행되지못했다.
북한 선사유적발굴중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에 전혀없는 평북 신암리출토의 『타래무늬토기』(일명 신암리형토기)와 평북 의주 미송리출토의 『미송리형토기』, 73년 발굴된 평남 덕천 승리산의 10만년전 『덕천인두개골』(네안데르탈인), 뼈 조각등-.
이밖에 평양 대현동동굴에서 발굴된 『역포인』(7∼8세 소녀 두개골)도 직립원인과 네안데르탈인의 중간인으로 추정된 중요 고대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북한이 「궁산문화」로 내세우는 서해안 일대의 선사유적발굴조사는 서울의 암사문화권과 맥락을 같이하는 학계의 관심대상인 고대사자료다.
분단과 지리적 여건으로 불균형을 이루게된 남북한의 문화재발굴조사는 한국정부가 제의한 고대사자료교환전시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민족의 동질성 확인과 함께 선사고고학등의 학문체계를 정비할수 있게될 것같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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