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뉴스] 김병지 "삽질 한 번에 히딩크에 찍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쳤다” “신들렸다”

김병지(35ㆍ포항 스틸러스·사진)가 118경기 무실점으로 K-리그 새 기록을 세운 18일의 전북 현대전.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김병지의 놀라운 순발력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전북이 전ㆍ후반 1개씩 골대를 맞혀 김병지에게 운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반 중반 이후 날아든 왕정현ㆍ보띠ㆍ손정탁의 소나기슛은 보통 골키퍼로서는 정말 막기 힘든 것이었다. 김병지는 그날 만큼은 요새 말로 ‘야신 모드’였다.

18일 밤 경기가 끝난 뒤 포항 선수단을 따라 전주에서 이동, 새벽 2시에 포항에 도착했다. 19일 오후 포항 스틸러스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인터뷰 내용은 중앙일보 스포츠면의 인기 코너인 ‘스타 산책’에 실려 있지만, 지면 사정으로 싣지 못한 내용 중에 중요한 멘트가 있다. “국가대표에 다시 뽑히고 싶다”는 것이다.

김병지는 2002 한ㆍ일월드컵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월드컵 1차전 폴란드전 선발은 당일 아침까지 자신이었다고 한다. 막판에 히딩크 감독이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병지는 전날 가족들에게 알려서 응원 오라고 했고, 이운재는 당일 아침에야 부랴부랴 가족에게 연락했다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과는 ‘코드’가 맞지 않았어요.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사람이었고, 나는 자유롭게 해 주면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죠.”
김병지는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지 얼마 안된 2001년 1월, 홍콩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삽질’을 했다. 공을 몰고 하프라인까지 나왔다가 상대에게 뺏겨 실점할 뻔 한 것. 당시 얼굴이 벌개져서 벤치의 히딩크 감독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찍힌 게 끝까지 갔다는 게 김병지의 주장이다.

이운재(32, 수원 삼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운재요? 좋은 선수죠”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과는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다고 했다. “운재하고 나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항상 ‘안정감’을 말하는데요. 나는 절대 안정감에서 운재에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필드 플레이어만큼 공을 다룰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앞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운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게 다를 뿐이죠.”

어쨌든 2002 월드컵 이후 김병지는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물론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다. “3회 연속 월드컵에 나가고 싶은 꿈이 있지요. 대표팀이 젊은 선수를 키우는 것은 좋지만 주전이 갑자기 빠질 때를 대비해 믿을 수 있는 ‘세컨드 골키퍼’는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젊은 선수는 김용대(26ㆍ부산 아이파크)와 김영광(22ㆍ전남 드래곤즈)이다. 자신이 세컨드 골키퍼라면, 스스로 이운재의 대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 K-리그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죠.”

자, 그럼 기록을 보자. 김병지는 366경기 출장에 384실점(경기당 1.04), 이운재는 199경기 205실점(1.03), 김용대는 86경기 116실점(1.35), 김영광은 46경기 48실점(1.03). 김용대를 빼고는 세 명의 실점률이 거의 똑같다. 그러나 경기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김병지는 이운재의 거의 2배, 김영광의 8배 가까이 경기를 더 뛰었다. 이들이 김병지와 같은 출장 기록을 세웠을 때 지금의 실점률을 유지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올 시즌 기록은 더 차이가 난다. 김병지(15경기 11실점, 경기당 0.73)는 경기당 1실점을 넘어선 이운재(10경기 11실점), 김용대(12경기 15실점), 김영광(13경기 14실점)을 압도한다. ‘프로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인 선수를 대표팀에 뽑아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한다면 김병지는 당연히 지금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 있어야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기장 안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오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김병지가 국내 골키퍼 중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김병지가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3회 연속 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우즈베키스탄ㆍ쿠웨이트 원정에 나설 대표팀 골키퍼들이 어떤 기량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물론 김병지 본인이 K-리그에서 꾸준한 경기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영재 기자 < http://blog.joins.com/jerry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