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백년」의 주역들<1>|신미양변과 「로저즈」제독|「강화상륙」과 「인천상륙」의 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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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미 수호초약체결을 계기로 한 한·미 관계가 내년으로 수교1백년을 맞는다. 「로저즈」제독의 「포선외교」로 막이 오른 한·미 관계가 「우방」으로 그 위치를 굳히기 까지는 그야말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미관계사를 수놓았던 역사적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한·미 l백년을 조감해본다. 본지는 미주 등지의 증언을 듣기 위해 특별취재팀을 현지에 파견했다.
l871년6월10일 토요일 상오10시30분. 작약도와 율도 사이에 출전채비를 완료한 미국아시아함대에서 바라본 인천항의 풍경은 정말 한가로왔다. 초여름의 날씨는 쾌청했고 약간 더웠지만 점점이 박혀있는 초가지붕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모습 그대로였다.
함대사령관 「존·로저즈」 2세는 기합콜로라도호에서 원정군사령관 「블레이크」해군중령 등 8백8명에게 기세등등하게 독전했다.
『서울까지 진격하라! 그리하여 다시는 잊어버릴 수 없도록 이 나라의 이교도들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라!』
전투로 접촉을 개시
포함 모노카시호(길이80m·배수량l천3백70t)와 팔로스호(길이41m·배수량4백20t)를 앞세운 원정군은 증기란치선 4척, 상륙용 소형선박 22척을 거느리고, 병력은 4개 보병중대로 편성되었고 상륙중대병력은 6백18명 등 총8백8명이었다.
후일 신미양변로 불린 이 사건의 발단은 제너럴 셔먼호사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대원군의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박해가 일어나 배외감정과 쇄국의 의지가 드높던 고종3년(서기1866년)은 병인사옥에 대한 프랑스함대의 내침설이 분분하여 인심이 술렁이던 때였다.
8월 중순 황해도연안에 도착한 이 미국상선은 황주목사 정대식이 그 배의 내륙수면 진출을 허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음에도 기어이 평양까지 항진하여 통상을 하겠다고 했다. 배 안을 둘러보니 대포·조총·환도 등 각종 병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l882년 뉴욕에서 『음자의 나라, 한국』을 출판했던 「월리엄·그리피스」는 이 배의 항해목적이 왕릉도굴에 있었다고 말했다.
『승무원들은 평화적인 통상을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만큼 애당초부터 그들의 항해성격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여러 왕조의 왕들하 묻혀있는 평양의 왕름은 순금으로 되어있다고 중국에는 소문이 나있던 만큼 그들의 항해는 그 금을 어떻게 좀 얻어보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8월20일 평양사포구에 도착한 제너럴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통상을 요구하면서 수심을 재고, 상륙하여 성경책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선지방관들은 두 차례에 걸쳐 쌀·쇠고기·닭·계란 등을 그들의 요청에 따라 무상으로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장마로 불어난 강상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다가 그들을 감시하던 평안순영중군 이현익을 부잡아 배 안에 가두고 풀어주지 않았으며 대포와 조총을 마구 난사했고 8월31일에는 미곡과 식품을 약탈하고 조선군민 12명을 사상했다.
마침 물이 빠져 배가 자유롭게 운항할 수 없게되자 그들의 미친 행동은 더욱 거칠어졌다. 『만약(그들이) 즉각 물러가지 않으면 몰살시켜 버리라』는 대원군의 명령을 받은 평양감영의 화공계에 걸려 제네럴 셔먼호는 9월5일 불타버렸고 선원들은 모두 죽었다.
대통령이 정벌훈령
이 소식은 같은 9월에 결행된 프랑스함대의 조신침략(병인양변)의 길잡이가 되었던 프랑스총부 「리델」이 중국에 돌아와 미국 측에 전했다. 1866년11월12일 「시워드」미국무 장관은 북경주재 공사관으로부터 셔먼호사건의 전말(피해자로서의 일방적인 보고를 접수하고 미·불 공동원정대를 추진하는 한편 l87l년까지 두 차례나 전함을 파견하고 또 청나라를 통해 집요하게 진상의 파악과 아울러 배상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조선정부의 사실 그대로의 해명은 제국주의적 눈으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그랜트」장군은 「모험적인 제국주의 노선」을 택한 「피시」국무장관의 조선원정안을 받아들여 l870년 연두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조선해안에서 미국의 조난선원에 대한 조선인의 야만적 대우(셔먼호사건 지칭)을 근절시키기 위해 본인은 「프레더릭·로」북경주재공사에게 앞으로 이러한 조난선원의 안전과 인도적 대우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훈령을 내린다. 필요한 경우 「로」공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로저즈」제독에게 충분한 병력을 인솔토록 하여 「로」공사를 수행하길 바란다.
특명전권공사의 호송임무를 맡았다가 결국 한·미전쟁의 악역주연을 연출한 「존·로저즈」2세는 미국해군의 전통있는 집안출신이었다.
선친은 유명한 해군제독으로서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제독에게 정신적 영향을 미쳤고 「로저즈」2세는 그 「페리」 밑에서 일본개항작전에 같이 참여했다.
억센 턱과 흰 구레나룻, 중키의 뚱뚱한 해군제독은 남북전쟁의 명장이며 베링해협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탐사한 공적을 가진 팽창주의자였다. 「로저즈」제독은 5월초 기함 콜로라도호, 코르벳함인 알래스카호와 베니시아호, 포함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 5척의 함정에 곡사포6문 등 대포85문, 수병·해병 등 총병력 1천2백30명의 조선원정군진용을 끝내고 보름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유능한 교섭자이자 외교관」(「월레스」 당시 해군장관 평)인 「로저즈」제독은 이 원점에서 18년 전 일본을 개항시켰던 「폐리」제독의 포함 의교방식을 다시 연출하겠다면서 『따라서 조선인은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로」전권공사는 처음부터 조선과의 교섭은 「희망없는 사건」이라고 비관했다.
조선으로 향한 함선에서 병사들의 생각은 갖가지 막연한 정보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원정함대는 5월30일 아침 인천의 작약도와 속도사이에 정박했다. 강화상륙작전의 해변선봉장이었던 「맥레인·틸턴」대위는 아내폴리스에 있는 그의 아내 「나니」에게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어보냈다. 『이 나라는 아름다운 언덕과 계곡으로 가득 차 있고…. 조그만 초가지붕을한 촌락이 산밑 깊숙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소』라고 했다.
양서에 대포가 꽉 차
남양부의 관리와 몇 차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5월30일 기함을 방문한 조선관리 4명은 맥주와 서양요리를 대접받고 조선인으로는 최초의 사진까지 찍었다. 한편 「로저즈」사령관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조선하급관리에게 강화해엽의 수로탐측을 제의했고 그에 대해 가부표시를 하지 않았던 (실제로는 할 권한이 없었지만) 그들의 태도를 승인으로 간주했다.
해군중령 「블레이크」는 6월1일 포함2척과 기정4척을 이끌고 수로탐측에 나섰다. 탐측대가 북상하면 서쪽이 겨우 90여m의 손돌목의 소용돌이에 이르자 해안양측의 포대에는 『수많은 군기가 펄럭이고 대포는 총총이 배열되어 있었다.』
불길한 정적속에 홀연 포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15분간 약2백발의 포탄세례를 받은 탐측함대는 일제 반격에 나섰다. 남북전쟁의 격전지에 참전했던 노련한 「블레이크」중령조차 『남북전쟁에서도 그처럼 좁은 장소와 짧은 시간에 그토록 치열한 포화와 탄우가 집중된 적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전사자는 조선측의 l명으로「그리피스」는 『1명을 죽이기 위해 lt의 탄환을 소비한 전투』였다고 쓰고있다.
「로저즈」제독과 「로」공사는 조선측의 공격을 「까닭없는 방자한 공격」이기 때문에 조선당국의 정식 사죄가 없는 한 보복원정을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6월10일의 디데이를 앞두고 조·미 양측은 율도의 백사장에 장대를 세워놓고 그 장대에 서로의 주장을 편지로 전하는 「장대외교」를 벌였다. 그러나 해관침범에 대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조선과, 「까닭없는 공격」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미국측 사이에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6월10일 조-미 전쟁을 연 원인과 근원은 그런 역사를 가졌다. 48시간만에 막을 내린 이 전쟁에서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창과 칼로만 미군을 상대로 싸우다가…역수공권이 되자 맨손으로 흙을 움켜쥐어 적군의 눈에 뿌렸다』(은자의 나라, 한국) .
"승리 같잖은 승리"
남북전쟁 이후 미-서전쟁(1898)까지 미해군의 최대전투이며 미군의 최초의 아시아 대륙전쟁이었다는 이 전쟁은 미군전사자 3명에 비해 조선전사자는 최소한 3백50명이었다. 그래서인지 미국국내의 반응은 신랄했다. 『승리? 그렇다. 틀림없는 승리지만 어느 누구도 그다지 자랑하지도 않고, 기억에 남겨두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조선으로부터 어떠한 이득을 얻어낸다고 해도 그토록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피의 보상」은 할 수 없을 것이다.(이상 참전장병의 수기)
이 전쟁을 약 한달 후에 처음으로 보도한 뉴욕 헤럴드지는 『우리의 「작은 전쟁」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시아전역에서 대원군의 항쟁이 도리어 승리했다는 인상만이 계속됨은 물론이요, 이와 반대로 미국민은 심각한 좌절감을 금할 수 없게 되었다』면서 『「로저즈」제독은 전투에 승리했으나 「론」공사는 외교에 실패했다』고 평했다.
한·미 관계 1백년은 「로저즈」제독의 이같은 악연에서 비롯했지만 미해군-사가 「월리엄·레이리」는 신미양변에서의 「피의 보상」은 6·25동란에서 「맥아더」원수의 인천상륙군에 의해 상쇄되어 「영원한 혈맹」의 수평관계로 발전한다고 증언한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피의 보상을 해야한다면 강화도에서의 48시간 전쟁이후 79년이 흐른 l950년 강화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천해변에 나타난 미국의 출정군에 의해서 갚은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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