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사람의 향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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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송기원 지음, 창작과비평사, 8천원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후 소설과 시 창작을 동시에 하고 있는 송기원(宋基元.56)씨의 신작소설집.

남도 새재(鳥城) 장터 거리에서 '영악한 싸움꾼'으로 자란 작가의 어린 눈으로부터 한세상 살고 난 지금의 시각에서 한 시대를 험난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 향기를 불어넣은 9편의 연작 단편을 싣고 있다.

40, 50년 전 가난했던 시대에 그것도 장애이거나 결손 가정의 더없이 한 많은 인물들이지만 작가의 넉넉한 시선에 의해 그 한마저 따스하고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이 된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책 끝에 실린 '작가의 말'또한 진한 감동을 불러낸다.

"소위 운동권에 그야말로 어설프게 몸담게 되면서부터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허위의식을 배우고, 그 허위의식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게다가 남들 앞에서는 그럴 듯하게 위선도 떨게 되었다."

이런 주제에 더 이상 누구에게 무슨 글을 쓰겠느냐고 자문하며 宋씨는 글쓰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한 5년 지리산이며 계룡산의 암자, 히말라야 골짜기의 수도원 등을 찾아 명상을 했다. 자신을 송두리째 버리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마침내 宋씨는 "애초부터 나의 삶은 잘못된 부분이 없으며, 무구(無垢)자체"임을 깨달았다.

데뷔 이후 민주화 운동의 앞장에, 진보적 문예지'실천문학'을 주관하며 문단의 한가운데서 술도 많이 사주며 후배들을 격려했던 宋씨가 산중으로 들어가자 문단은 적이 섭섭했다. 그러다 물씬 풍기는 사람 냄새에는 아무런 죄도 없다며 장터거리로 돌아온 것이다.

"대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살아낸 삶의 고통과 쓰라림과 막막함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과 쓰라림과 막막함으로까지 외연을 넓혀가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결국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다 함께 동류의식을 갖는 일이 아닌가."

'울보 유생이'에서 중학시절 외사촌형 유생이가 생모를 만나는 장면을 회상하며 작가의 문학관을 밝힌 말이다. 자신보다 몇개월 빠른 유생이에게 어머니는 항상 형으로 부르며 형 대접 잘해 줄 것을 원한다.

그러나 장터 꼬마 싸움패로서 화자는 체면상 형이라 부를 수 없었을뿐더러 유생이를 패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유복자로 태어났고 생모마저 집을 뛰쳐나간 그 불쌍한 사연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할 무렵 그 슬픔에 동류의식을 느끼며 문학은 그런 것 아닌가 하고 묻고 있다.

30년 후 유생이가 생모와 함께 나타났다. 두칸 짜리 전세방을 가까스로 마련,어머니를 모시게 됐다는 것이다. "유생이 성, 그럼 잔치 한번 해야제"라고 작품은 끝을 맺는다.

작품집 맨 앞에 실린 '끝순이 누님'은 당달봉사 끝순이에 대한 이야기. 무당의 딸로 떡이며 과일 등 굿 음식을 잘도 줘 친하게 지낸 끝순이 누님은 어느날 겁탈당해 애를 배게 되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죽자 홀연 고향을 등진다.

서울 지하도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구걸로 연명하던 끝순이는 성장한 아들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 작가와 가슴 벅차게 재회한다.

대부분 어두운 곳에서 신산한 삶을 산 사람들이지만 '그럼 잔치 한번 해야제'하는 식으로 소설들은 행복하게 끝난다. '어떤 삶도 무구하다'는 깨친 시각이 그들의 삶을 그들의 것들로 되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이나 고향 상실 등에 지레 기대 작가가 먼저 비분강개하거나 슬픔에 너무 빠져 있는 우리 중진.중견 소설계에 '사람의 향기'있는 여유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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