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의 책상] 한 번도 공부 강요 안 한 엄마, 고마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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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군은 수업이 끝난 후 자율학습실로 이동하는 대다수 학생과 달리 교실에 남아 공부한다. 교실 뒤편 사물함에 모든 교재가 있어 언제든 원하는 과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 천국. 용인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설고등학교(옛 용인외고) 2학년 전교 1등 김동환군 얘기다. 그는 어려서부터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엄마와 걷다가 “자동차는 어떻게 움직이냐”거나 “계절은 왜 생기냐”고 물었다. 엄마 강연심(43·경기 분당구 금곡동)씨는 답을 바로 알려주기보다 아이 스스로 탐구할 수 있게 도왔다. 자동차에 대해 질문하면 도서관의 자동차 관련 코너에 데려가 “여기서 찾아보라”는 식이었다. 이런 습관은 자연스레 자기주도학습으로 이어졌고, 전교 1등의 비결이 됐다.

김동환군에겐 특별한 책상이 없다. 물론 집과 기숙사 방에 각각 자기 책상이 있지만 외대부고에 진학하면서 대부분 교실 책상에서 공부한다. 평일 자율학습 시간은 물론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교재가 교실 사물함에 있어 언제든 원하는 과목을 펼쳐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환이는 한 시간이면 보통 3~4과목을 번갈아 가며 공부한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막히면 과학을 공부하는 식이다. 그는 “집중이 안 될 때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며 “수학 한 문제만 낑낑거리며 풀기보다 잠시 다른 과목을 공부하다 다시 문제를 보면 해결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수업 시간 필기한 내용 등이 빽빽하게 적힌 교과서.

 그가 교실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칠판이다. 4단계에 걸쳐 교과서를 읽은 후 맨 마지막 단계로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적으며 정리할 때 칠판을 이용한다. 그런데 교과서를 어떻게 4단계로 나눠 읽는다는 걸까. 우선 수업 때 필기한 내용을 교과서에 옮겨 적으며 읽는 게 1단계다. 이후 참고서 내용을 추가하면서 정독하는 게 2단계, 필기내용과 교과서를 함께 보는 게 3단계, 교과서 내용만 읽으면서 필기를 떠올리는 게 4단계다. 이렇게 교과서를 4~5번 정독한 후 머릿속에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교실 칠판에 정리한다.

 지금은 교과서를 4~5번 읽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꼼꼼히 봤던 건 아니다. 대충 훑어봤다. 교사가 수업 중 강조하는 내용만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내신 시험 공부할 때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러다 뼈아픈 경험을 했다. 1학년 생물 시험에서 교과서만 제대로 읽었으면 맞힐 수 있는 문제를 틀린 거다. 비로소 교과서 중요성을 알게 됐고, 2학년에 올라와 교과서 중심으로 학습 방법을 바꿨다.

 교과서를 열심히 읽기 시작한 후 성적도 올랐다. 점수가 조금 오른 정도가 아니다. 고2 1학기 때 난생 처음 전교 1등을 했다. 늘 우등생이긴 했지만 중학교 시절엔 전교 2~3등, 고1 때는 전교 13~15등 수준이었다. 그는 “성적 올리려고 괜히 수준 높은 교재 푸는데, 그보다는 교과서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교과서를 등한시하면 상위권은 될 수 있어도 최상위권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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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성적 받는 비결은 또 있다. 타고난 지적 호기심을 심화학습으로 연결하는 거다. 그는 수업 동안 교사의 말 한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고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꼭 확인하고 넘어간다. 예컨대 수학 시간에 교사가 미분을 얘기하면서 “편미분도 있다”고 하거나, 행렬에 대해 설명할 때 “선형대수학에서는 이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면 이 부분과 관련한 자료를 찾아 공부하는 식이다. 주로 칸 아카데미(Khan Academy) 같은 인터넷 강좌나 인터넷 백과사전을 참고한다. 간단한 내용은 2~3시간, 어려운 건 하루 이틀 걸릴 때도 있지만 시간낭비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1학년 물리 시간에 “전기력하고 자기력이 상대론적 관점에서 보면 같다”는 설명을 들은 후 전자기학에 관심이 생겨 대학 물리학과 교재인 기초전자기학(Introduction to Electrodynamics) 원서를 구해 매일 밤 1시간씩 읽고 있다. 내용이 어려워 책 읽는 속도가 더디지만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는 짜릿함에 손을 놓을 수 없단다.

 이처럼 동환이는 단순히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부만 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이런 방법이 때론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수학 시간에 ‘외적’이라는 단어를 듣고 따로 공부했는데, 그 덕분에 남들은 15분 넘게 들여 푸는 문제를 3분 만에 해결했던 경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성적과 상관없는 내용을 죽자 살자 파고 든다. 입시 준비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고등학생이 왜 성적과 무관한 내용을 공부하는 걸까. 김군은 “평생 입시공부만 할 건 아니지 않느냐”며 “지금 공부하는 내용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답답할 때도 많다. 국어·영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해도 부족할 판에 대학 교재를 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 강씨는 동환이에게 “쓸데없이 대학 물리학 교재 그만 보고 국영수 공부에 집중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늘 동환이 편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공부 안 하고 게임을 하거나 TV만 보고 있어도 강씨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교육철학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리적으로 도와줄 여력도 안 됐다. 약국을 운영하고 있어 집에 돌아오면 늘 밤 9시가 넘었기 때문이다. 꼼꼼히 학습 관련 내용을 챙길 시간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강씨는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동환이가 어려서부터 수학·과학에 두각을 나타내자 과학고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단다. 문제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학원에 데려 갔지만 선행학습이 안 돼 있어 들어갈 반이 없었다. 결국 학원도 못 다닌 채 시간만 흘렀고 그렇게 과학고 원서 접수기간이 지났다.

 하지만 이렇게 교육정보 어두운 엄마를 둔 덕에 동환이는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과학 잡지를 보다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곧바로 인터넷과 책을 뒤져 원하는 정보를 찾아냈다. 강씨는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숙제 다했느냐”고 묻는 게 전부였다. 동환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걸로 끝. 한 번도 숙제 검사를 한 적이 없다. 엄마는 ‘믿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지만 본인 몸이 피곤하다보니 미처 챙길 겨를이 없었던 건 아닐까. 무엇이 됐든 동환이에게는 도움이 됐다. 동환이는 “어릴 때 엄마가 하나부터 열까지 체크하고 교과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잔소리 했으면 학습에 흥미를 잃었을 것 같다”며 “바빠서 나한테 신경을 많이 못쓴 게 돌이켜보면 오히려 약이 됐다”고 말했다.

 잔소리를 안했다고 방치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혼자 하는 생활습관은 철저하게 가르쳤다. 방 청소, 책상 정리 등도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힘으로 하게 했다. 강씨는 “생활 속에서 혼자 하는 버릇을 들인 게 학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전민희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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