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판 뒤집기 25년 … 쉰 살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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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태양의 도시Ⅱ’ 앞에 선 이불(50). 전시장(33×18m) 바닥과 벽면에 거울과 조명을 설치했다. 관객들은 거울 조각들이 이루는 빈 공간을 미로삼아 전시장을 가로질러 가며 작품을 체험하게 된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1989년, 스물다섯 살의 이불은 서울 혜화동의 한 소극장에서 벌거벗은 채 거꾸로 매달렸다. 퍼포먼스 제목은 ‘낙태’. 25년이 지난 올 가을, 이 데뷔작 비디오가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공개됐고, 이불은 ‘눈(Noon) 예술상’을 받았다.

오쿠이 엔위저 2015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 등 심사위원들은 “기존의 시각 문화에 도전하면서 남성 중심 사회 속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을 고발하는 이불의 초기작은 현재까지 커다란 여운을 남기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평가했다.

 #2.29일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카고 팬츠에 가죽 재킷을 입은 백발 여성이 지하 1층 전시장에 섰다. 높이 15m, 이 미술관에서 가장 천장이 높은 전시장엔 탑 혹은 비행선을 닮은 작품이 매달려 있었다.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연기로 천장의 빛이 부서져 내렸다. 저 괴물체는 천장을 뚫고 올라가려는 중일까, 아니면 이미 파국을 맞아 떨어져 내려오는 중일까. 제목은 ‘새벽의 노래Ⅲ(AubadeⅢ)’. “이것은 희망의 증거인가, 아니면 절망을 뜻하나”라고 묻자 올해 쉰이 된 작가는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비전을 실현코자 다시 시도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답했다.

‘새벽의 노래Ⅲ’.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3월 1일까지 그의 대규모 신작 두 점을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4 : 이불’전이다. 우리 미술계 중진 한 명의 신작을 소개하는 시리즈로 현대차가 1년에 12억원씩 10년간 후원한다.

그 첫 주자로 나서게 된 이불은 “작가 개인 차원에선 발표할 수 없어 아이디어나 드로잉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을 전시장에 구현할 기회”라며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고, 사랑에 빠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대 미술의 여전사-. 이불은 오랫동안 이렇게 불렸다. 괴물옷 퍼포먼스(‘갈망’‘수난유감’), 구슬 꿴 날생선 전시(‘화엄’) 등의 도발로 화제를 모았던 초창기 그의 작품 세계는 ‘인습타파’ ‘미의 개념 전복’으로 요약된다.

90년대 후반부터 뉴욕 현대미술관, 뉴뮤지엄, 구겐하임미술관, 베니스비엔날레, 퐁피두센터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2005년부터는 유토피아에 대한 인간의 꿈과 좌절을 그린 ‘나의 거대 서사’ 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2년 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시작한 대규모 회고전은 룩셈부르크현대미술관(MUDAM)을 거쳐 영국 버밍엄의 아이콘갤러리로 순회중이다.

 서울관의 두 점과 광주비엔날레에 나온 퍼포먼스 영상들은 한 작가의 데뷔작과 최근작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초기 퍼포먼스 ‘낙태’에 대해 이불은 “실은 그 영상을 스스로 보는 게 힘들다. 공교롭게도 25년의 시간, 거리, 여정이 서로 연결됐다. 그 거리가 약간 어지럽다”고 말했다.

 ‘낙태’ 퍼포먼스 때 이불이 거꾸로 매달린 줄을 잡고 있었던 이는 당시 대학 1학년생인 정연두였다. 후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7)에 꼽힌 이 다섯 살 연하의 후배 작가가 들려준 뒷얘기는 이랬다. “퍼포먼스가 끝난 뒤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게 두렵지 않은가’라고 어렵게 물었다. ‘비 오는 가운데 있으면 비 맞는 게 두렵더냐’라는 멋진 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서울관에 내놓은 또 다른 신작은 ‘태양의 도시Ⅱ’, 이 작품을 보러 전시장에 들어가면 벽과 바닥의 거울 속에 나와 당신, 그리고 작가 자신의 모습까지 투영될 것이다. 이불은 계속 전진 중이다. 그의 도전은 25년이 지난 오늘 새로운 버전으로 지속되고 있다. 10월 15일엔 작가와의 대화가 마련돼 있다. 02-3701-9500.

권근영 기자

◆이불=1964년 경북 영주 출생, 87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98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서 휴고 보스상을, 99년 베니스 비엔날레 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2007), 도쿄 모리미술관(2012)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불은 본명으로 ‘새벽 불(<6622>)’자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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