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헌재가 최고 갈등조정 기구가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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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세계헌법재판회의 총회 개막식에 참석해 “헌법재판은 정치적 대립과 인종·문화·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이 사회 통합과 법치를 바로 세우는 데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총회에는 전 세계 90여 개국의 헌법재판기구 수장과 대법원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이날 아시아 인권재판소 설립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당사자가 직접 헌법소원을 낼 수 있는 등 앞선 제도로 터키·태국·몽골 등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 있는 헌재가 아시아 지역의 인권 증진을 선도하겠다는 뜻이다.

 헌재는 1988년 창설된 뒤 26년간 우리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행정수도 이전 심판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처리했다. 헌재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우리 사회가 분열됐을 수도 있는 갈등 사안들이었다. 특히 노 대통령 탄핵을 놓고 서울 도심에서 매일 촛불집회가 열리는 등 당시 여론의 대립은 첨예했다. 헌재는 노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어겼다고 볼 수 있지만 탄핵 사안은 아니라고 결정했다.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해 절충한 결정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극심한 분열은 상당히 완화될 수 있었다.

 헌재엔 지금 정치권에서 우선 해결해야 할 각종 갈등 현안이 몰려들고 있다. 심지어 국회 폭력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 만든 국회선진화법도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이 청구된 상태다. ‘정치의 사법화’가 심해진다는 비판도 있지만 국회가 갈등 조절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헌재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권 등 각종 이해집단의 시도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 과거 헌재는 정부와 정치권, 여론에 따라 결정을 바꾸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 헌재가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증폭시킬 우려도 있다. 헌재가 국민적 신뢰를 지속하려면 외부의 영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며 ‘50대 남성 판사 출신’이라는 재판관 구성을 다양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