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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밑에서 꺼낸 공개 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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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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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파원

일본 전통 가옥에는 다다미 방이 있다. 짚으로 짠 바닥 판에 왕골 돗자리를 얹은 다다미는 고온 다습한 여름철 습기 제거와 통풍에 효과적이다. 다다미는 뭔가를 숨길 때도 유용하다. 이를 빗대 일본엔 “실수를 탁 털어놓고 인정하기 힘들면 다다미 밑으로 재빠르게 쑤셔 넣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다. 특히 집단 전체의 체면이 걸린 경우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다미 밑에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해진다.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대중 앞에 서서 고개를 90도 넘게 숙인다. 눈물까지 흘리면 훨씬 감동적이다. 1997년 11월 일본 4대 증권사 중 하나인 야마이치(山一) 증권이 파산했다. 최고 경영자는 기자회견장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모든 게 제 책임입니다. 직원들이 재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극적인 공개 사과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직원들은 대부분 새 직장을 얻었다. 과오도 일정 부분 덮였다.

 최근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자살한 주부의 유가족에게 사과했다. 사전 예고까지 했고 일본 언론들은 이를 상세히 다뤘다. 원자력 보상 상담실장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깊이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목소리는 떨렸고 눈빛은 흔들렸다. 다음날 취재를 위해 도쿄전력 본사를 찾았다. 홍보부 직원은 “공개 사과 기사를 잘 써달라”고 당부했다.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비판하지 말라는 속내가 느껴졌다.

 와타나베 하마코(당시 58세)는 2011년 7월 분신 자살했다. 원전사고 이후 4개월간 피난생활을 하다 우울증을 얻었다. 잠깐 후쿠시마 집에 들렀을 때 “피난처엔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남편에게 말한 게 유언이 됐다. 자살 책임을 놓고 2년 넘게 소송이 진행됐다. 도쿄전력은 “자살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심리적으로 너무 약했던 것 아니냐”며 자살과 원전사고의 인과 관계를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지방법원은 지난달 유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즉시 항소할 것으로 예상됐던 도쿄전력은 2주 후 입장을 바꿨다. “조기에 소송을 끝내기로 했다”며 갑자기 공개 사과했다. 쏟아지는 비판과 산적한 과제, 잇따르는 소송의 출구 전략으로 분석됐다. 어민들은 원전 오염수 해양배출에 반발하고 있고 사고 수습에 참여했던 원전 근로자들은 밀린 임금과 위험수당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일본인들의 공개 사과는 때론 신선하다. 큰일이 터져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사람 없는 우리 현실과 비교하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버틸 때까지 버티다 어쩔 수 없이 다다미 밑에서 꺼내는 눈속임 식 공개 사과는 거북하고 불쾌하다. 얼마 전 일본 문화 관련 책에서 “사과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게 아니다. 비난하는 자들의 입 막음 조치에 불과하다”는 글을 읽었다. 93년 고노(河野)담화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공개 사과했던 일본 정부가 요즘 강제동원 사실을 다시 부정하며 딴소리를 하는 걸 보면 딱 맞는 내용이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