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존 주민등록번호 보완해 계속 사용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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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번호 집단 유출 사건을 계기로 다양한 대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기존 주민등록번호의 존속 카드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기수 안전행정부 자치제도기획관은 29일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열린 '주민등록 번호 개선 방안 공청회'에서 "오늘 제시된 6개 방안은 정부가 마련한 대안이 아니고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용역 결과일 뿐이며 이들 중에 정부가 우선순위를 둔 안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공청회 말미에 마이크를 잡은 김 기획관은 "(오늘 제시된 안 중에 정부가 대안을 확정할 것 처럼)일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면서 "오늘 공청회는 국민 불편을 주는 주민등록제도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안이 오늘 제시된 안들 중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본지와 별도로 만난 김 기획관은 "기존 주민등록번호를 보완하는 방안과 함께 전면개편하는 방안을 배제하지 않고 논의를 전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공청회에서 제시된 6개 중에서 몇 개를 압축하겠지만 여전히 기존 주민등록번호를 보완하는 방안도 같이 대안으로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김 기획관은 "지방행정연구원이 제시한 일부 대안은 시스템 교체 등에 따른 비용이 너무 클 수 있고, 다른 일부 대안은 편의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주민등록번호를 전면 폐지하면 65세 이상 노인이 지하철을 탈 때 신분 확인이 불편하고, 인터넷으로 병원을 예약하기 불편하고, 미성년자에게 담배 판매 금지와 술집 출입 제한 과정 등에서 본인 확인에 불편이 따를 것이란 얘기다.

김 기획관은 "이번 공청회에서 제시된 대안들은 금융회사의 주민번호 수집을 금지한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8월7일 시행)이 나오기 전의 상황을 염두에 둔 방안"이라며 "기존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돼 신체나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본 경우 주민번호 교체를 허용하는 주민등록법개정안을 마련중이기 때문에 기존 제도 유지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공청회에서 전문가들은 지방행정연구원이 제시한 대안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상당수 토론자들은 기존 주민등록번호는 유지하되 제한적 관리에만 사용하고 무작위번호를 별도로 부여한 증을 상용하자는 대안에 대한 지지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우리에프와이에스 우리은행사업본부 노진호 전무는 "기존 주민번호를 폐지하면 엄청난 시스템 관리 비용이 든다"며 "기존 주민등록번호를 유지하되 발행번호를 별도로 발급하자"고 제안했다.

오강탁 한국정보화진흥원 전자정부 지원본부장은 "개인정보유출 문제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회사들의 번호 수집·관리에서 문제가 생겼다"며 "주민등록번호를 근본적으로 대체할 안은 과연 완벽한가"라고 반문했다.

김상겸 동국대 교수(법학대학원장)는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교체하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니 단계적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유승화 아주대 정보통신대학 교수는 "지금까지의 정보 유출 사고는 인재(人災)였다"면서 "정보유출과 정보보호는 창과 방패의 모순(矛盾) 관계라 번호가 바뀐다고 완벽하게 개인정보를 보호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고가 났다고 주민등록번호를 완전히 바꾸는 문제는 차분히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성화 국민건강보험공단 정보관리실장은 "새로운 주민등록번호를 만들어도 또 다시 노출될 경우에 대한 비용과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며 "복지·의료 등 다른 기관들과의 연계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최영훈 광운대 행정학과 교수는 "바꾸자는 쪽으로 논의가 시작됐으나 올 해 연구해서 내년에 바꾸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10-15년 장기 프로젝트로 전자주민증과 연계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오병일 진보네크워크센터 사무국장은 "기존 주민번호가 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개인정보 보호에 리스크가 있다"며 "교체비용을 지적하는 기관들은 기권득을 누리면서 인권침해 등을 해온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오 국장은 "현재의 주민등록번호 시스템 유지에 따른 비용도 생각해야 한다"며 "다만 1-2년 안에 바꾸자는 것이 아닌만큼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사회적 비용을 적절히 안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안행부가 단기간에 추진하기에 문제가 있으면 단계적인 로드맵을 내놔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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