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업고 13년 집권 카르자이 "우리는 미국의 희생양" 퇴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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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국의 지지를 업고 집권했던 하미드 카르자이(사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13년간의 임기를 반미 연설로 끝맺었다.

카르자이는 23일(현지시간) 카불 대통령궁에서 생중계된 연설에서 “아프간 전쟁은 우리에게 강요된 전쟁이며 우리는 그들(미국)의 이익을 위한 희생양”이라며 “미국은 아프간의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고 대립각을 세웠다.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직후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한 뒤 임시정부 수반으로 선출됐던 카르자이로서는 씁쓸한 마무리다.

그는 이날 작정한 듯 “순수한 뜻으로 아프간을 지원했던 나라들에 감사하다”며 인도·중국 등에 감사를 표했다. 재건 지원을 위한 병력을 파병했던 한국도 언급했으나 미국은 쏙 뺐다.

 21세기 들어 미국이 벌인 최장기전인 아프간전의 피로감에 시달리는 미국으로선 이런 카르자이가 괘씸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아프간 도로·학교 등 인프라 구축 및 군과 경찰력의 훈련을 위해 1000억달러(105조원)을 지출했고 미군 2200여 명이 사망, 2만여 명이 부상했다.

 게다가 이날 새벽 미국은 중동에서의 또 다른 장기전의 막을 올렸다. 시리아의 수니파 무장정파 이슬람연합(IS) 등의 거점을 공습하면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마라톤 전쟁을 시사했다. 주 아프간 미국대사인 제임스 커닝햄은 카르자이의 퇴임사가 “배은망덕하다”며 “미국인들의 희생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카르자이는 2009년 연임 때부터 미국과 갈등의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재선 과정이 부정선거 논란에 휩싸이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은 카르자이의 친척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된 것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국가 경제의 30%를 아편 생산에 의존하는 것을 두고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은 “마약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다 3선 연임이 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카르자이로서는 전임 대통령인 무함마드 나지불라의 최후가 떠올랐을 수 있다.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아프간 침공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나지불라는 1996년 수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반군에 붙잡혀 ‘소련의 꼭두각시’ 죄목으로 고문·처형 당했었다. 카르자이가 재선 후 ‘카불 대통령’이라 조롱 받으면서도 대통령궁에 칩거하고, 미국의 뜻을 거스르며 탈레반 포로를 풀어준 배경 중 하나로 풀이된다.

 카르자이가 미국에 대해 끝까지 행동으로 보인 불만은 상호안보협정 서명을 거부한 것이다. 연말까지 아프간 철군 계획을 세운 미국은 이 협정을 통해 1만여 명의 미군과 나토군을 남겨 아프간 군과 경찰력 훈련을 맡길 계획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거듭된 압박에도 카르자이는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그러나 후임자인 아슈라프 가니 당선인은 협정에 곧 서명할 것으로 알려져 그의 고집은 곧 잊혀질 유산이 됐다. 또 재임 기간 중 국내총생산(GDP)이 450억달러(46조9305억원)으로 2배 성장했고 국민의 초등학교 진학률이 21%에서 97%로 뛰는 등 성과도 조명되지 않는 쓸쓸한 퇴장을 맞게 됐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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