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어떻게 예술이 됐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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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호 32면

저자: 노소영 출판사: 자음과 모음 가격: 1만8000원

종종 취재 현장에서 신기한 구경을 하곤 했다. 한 패션쇼 오프닝에서는 모나리자와 미인도가 조각조각 흩어진 뒤 서로의 그림 속에서 재구성되는 화면이 등장했다. 또 다른 행사장에서는 페달을 밟는 속도와 횟수에 맞춰 곡이 연주되는 자동차를 시승해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참 재미있네’라고만 했지 예술이라고까지 여기진 못했다. 예술이라는 건 작정하고 공연장이나 갤러리를 찾아만나는 ‘그 무언가’여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디지털 아트』

알고 보니 그게 ‘디지털 아트’였다. 예술과 기술의 만남이었다. 더 이상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진실로 믿을 수 없는 시대, 감정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무한대로 늘어나는 세상, 뭣보다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게 바뀌는 현대사회에서 디지털 아트의 탄생은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분명했다. 고상 떨지 말고 모든 우연성과 무상함을 보여주리라!

일반인들에게 디지털 아트는 여전히 개념조차 낯설다. 하지만 국내에서 일찌감치 디지털 아트에 눈을 뜬 이가 있다.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53) 관장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시어머니의 권유로 우연히 예술 세계에 발을 들이고, 디지털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2000년 국내 첫 디지털 아트 전문 갤러리를 낸 이래 국내 작가 발굴과 작품 유통, 국제무대에서의 활로 개척에 힘쓰고 있다. 책은 그 현장에서 배우고 고민해 온 이론과 실천의 문제들을 정리한 기록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현재에 있어서 멀티미디어 예술에 관한 어떤 지식지도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이 든다”고 했던 노 관장의 말을 떠올려 보면 신간은 그 ‘지식 지도’의 출발점이라 여겨진다.

설사 예술에 문외한일지라도 완독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먼저 디지털 아트가 생겨난 배경에 이어 아트센터 나비가 설립된 이래 초창기 작업과 에피소드들을 담담하게 소개한다. 인간의 몸짓으로 생겨난소리가 인공생명 형태에 영향을 주고 다시 그것이 어항 속 물고기에 보여지는 ‘트라이럴로그’, 행인이 남긴 문자 메시지를 인터넷에 올려 공론화시키는 ‘워치 아웃(모리스 베나윤, 최두은 공동 작업)’ 등 10여 전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선구적인 작품들을 뒤늦게나마 감상해 보는 기회다. 또 동서양 명화를 차용해 작업하는 이이남, 인터넷에서 떠도는 저 해상도 영상소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노재운처럼 이 분야에서 자기 색깔을 내고 있는 작가들의 이름 석 자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페이지마다 많은 정보가 담겨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공들여 읽을 부분은 마지막 대담 파트가 아닌가 싶다. 네 명의 각기 다른 인터뷰어가 묻고 노 관장이 답하는 내용은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궁극의 문답이기도 하다. 가령 디지털 아트가 왜 중요한가, 디지털 아트가 아날로그 아트와 무엇이 다른가, 디지털 아트에서 예술과 산업은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나 등 말이다. 그리고 그 해법의 키워드는 창조력·소통·대중화·일상의 즐거움 등으로 요약된다. 예술이란 결국 시대의 거울이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인류의 열정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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