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길 목근통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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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일 별세한 김소운씨는 시인으로, 수필가로, 아동문학가로, 일본문학자로,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문학인이다.
불과 13세때 단신으로 도일, 저명한 일본시인「기따하라」 (북원백추)에 사사하면서「지상악원」의 동인으로 20세를 전후하여 일본시단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김씨는 해방전까지 3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면서 한국어·일어로 문제시를 발표하여 주목을 끄는 한편신문학개화이후의 한국문학을 일본문단에 소개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해방직전인 45년3월 귀국한 김씨는 48년 주간지『청려』를 발행하는 한편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를 건립하는등 고국의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울였으나 일제때의 활동으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등 시련을 겪기도했다.
51년에는 장편수필 『목근통신』을 대한일보에 연재, 이 글이 「중앙일보사」 에 일어로 번역소개되어 양국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52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동경에서의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정권을 비판한 것이 말썽이되어 그는 한국정부로부터 귀국을금지당하고 13년동안 일본에 체류하게 되었다.
김씨가 일본생활을 한것은 그의 70여평생동안 햇수로 50년, 만으로 따져서 30년에 이른다. 이동안 그의 최고 공적으로 꼽히는『조선민요집』 (29년) 『조선동요선』 (33년) 『조선민요선』 (39) 『조선시집』(43년)등 한국고금의 문학들을 일본에 소개, 일인들로 하여금 한국문학을 새롭게 인식하는데 기여했다.
김씨는 5·16군사혁명후인 65년 귀국한이래 본격적으로 수필문학에 몰두. 『물한그릇의 행복』등 10여권의 수필집을 내놓았으며 5, 6년전부터 불치의암과 투병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으며 한일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마음의 벽』『안개개는 날』 등 저작물을 일본의 사이마루출판사에서 내놓기도 했다.
김씨는 그의 대일관에서『우리가 일본을 미워할부분을 오히려 탐하고 일본을 알아야할 부분에는 눈을 감는 경우가 많다』 고 주장, 한일은 특히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늘 말해왔다. <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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